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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장님]더 살기 좋은 행복마을로 만들겠습니다..우계리 석명환 이장!

청솔댁 2017. 1. 4. 11:11



'첫째도 봉사요, 둘째도 봉사'라는 마음으로 주민들간의 화합을 이끌며 행복한 마을, 이사 오고 싶은 마을로 만드는 것이 이장의 책무라 여기고 열심히 봉사 할 것'을 맹서합니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자생적으로 근면.자조 운동을 벌여온 우계리(愚溪里), 행복마을 만들기를 위해 제2의 새마을 정신운동을 펼치고 있는 석명환 이장(66)은 '마을 발전을 위해서는 주민들간의 화합이 가장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5(2.4km) 거리에 있는 우계리는 동쪽으로 갈구1리와 보문면 승본리, 서쪽으로 생천리와 백전2리, 남쪽으로 동본2리와 통명리, 북쪽으로 갈구2리에 접해 있는 우계리다.

 

 

마을 앞을 지나던 국도 28호선이 4차선으로 확장되고 노선이 외곽지로 변경되고 마을 뒤로는 효자면으로 가는 지방도 927호선(도효자로), 우계리~용문면 연결 용우교가 20154월 준공 되는 등 사통팔달의 도로여건을 갖추어 전원주택로 각광받고 있다.

 

 

냉정산(冷井山 192m) 주봉(主峰)을 남쪽으로 두고 지맥으로 둘러쌓여 서북향으로 자리잡고 5개의 자연부락(아랫마, 웃마, 매골, 새터, 중간마)으로 안동 權, 청송 沈, 충주 石, 기타 성씨로 이루어져 있다.

 

 

우계리(愚溪里)219가구(14개반)463(남자 230, 여자 233)이 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162(35%)으로 90세 이상 12명, 최장수는 권태환 어르신으로 올해 93세[참고자료:1978년 인구현황 217가구 1,316(665, 651)최전성기.

 

 

우계리(愚溪里)1980년대 까지 1,300여명을 유지하다 1990년부터 1천명 이하로 감소하기 시작했으나, 전원주택 지역으로 외지에서 인구가 점차 유입되면서 읍 외곽지 마을로는 인구가 많은 실정이나 노인인구가 35%로 초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 주민 중 전업농가는 93가구(42%)로 회사원, 자영업 종사자가 더많고 농촌취락형태를 탈피 도시근교 마을로 변화해가고 있다. 실제로 우계리는 빈집이 생기면 바로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계리의 주요특산물은 쌀이 대부분이며 기타 잡곡류는 자가 소비 정도만 생산되고 있다.

 

 

마을 면적은 전체 면적 3,301,094.2(449,470, 442,168.6, 과수원 35,152, 임야 1,660,010, 유지 6,424, 목장 815, 대지 110,367, 공장용지 3,352, 창고용지 8,887, 도로293,034.2, 하천 83,733, 123,843.4, 종교용지 951, 묘지 24,316 , 잡종지 58,571)이다.

 

 

주요 공공시설로 대구경북능금농협 예천유통센터, 한국농어촌공사 예천지사가 있다. 산업시설은 예천기업, 신성상사, 예천자동차전문학원, 하늘원 장례식장, 대호고물상회, 남본벽돌, 삼성벽돌, 대우종합건재, 씨제이택배 동예천점, 롯데칠성음료예천대리점, 우계 정미소, 세진산업, 미당, 언덕숯불, 지산가든, 산장가든, 부림기사식당, 우계주유소, e-편한모텔 등이 있다. 외곽지 마을로는 많은 사업장이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

 

 

종교시설로 우계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우계리 495)19883월 이종만 전도사가 개척교회 신축~924이종만 목사 안수~949김정환 목사~20135김주광 3대 담임목사, 신자수는 22(청장년 14, 초중고 8)이다.(655-6295)

 

 

백합교회(재단법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유지재단, 우계리 373-2)894은풍면 시항리에서 순병기목사 7명이 '시항기도처'로 창립, 9110월 백전리 상가건물 2으로 이전, 972우계리 광대원길 16-6에 예배당을 준공하여 20038김경철 목사~20085박훈 목사 취임, 신자수는 50(청장년 27, 초중고 23)이다.(652-8480)

 

 

본래 예천군 동읍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광전동(廣田洞), 마동(瑪洞) 일부를 병합하여 우계동이라 해서 예천면에 편입되었다. 한천(漢川)의 형상이 우와계곡(牛臥溪谷)이라 하여 우계()라 정하려 했으나, 짐승의 이름이 부당하다 하여 자 대신 자를 넣어 우계동(愚溪洞)이라 칭했다. 1937년에 예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8로 변경됨에 따라 우계리(愚溪里)가 됐다.

 

 

우계리(愚溪里)16세기 중엽에 한양 씨가 와서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에 기와를 굽는 기와점이 있어 마 또는 왯골, 와계(瓦溪)라 하다가 변하여 우계리가 되었다. 우계리 자연부락으로는 아랫마(농어촌공사), 웃마(광대원), 매골(우계주유소 앞산 넘어 골), 새터(산장한우가든), 중간마(우계삼거리)가 있다.

 

 

전해져오는 마을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광대원(廣大院)은 우계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 앞에 넓은 내가 있으며, 이조 때 행인의 편의를 도와주는 광대원이 있었다. 안동 씨와 씨가 많고, 1980년에는 99가구 651명이 살았었다.

 

 

광대원을 세분하면 제일 밑에 잇는 동네를 아랫마, 중앙에 있는 주택단지를 새동네(새마을), 윗부분에 위치한 마을을 웃마(윗마을), 하리(은풍)통로에 있는 마을을 박재, 맷골통로 연못이 있는 곳을 뒤골이라고 한다.

 

 

옛날 광대원에는 옹기를 만들던 가마터(하리 통로)가 있었는데, 이곳은 찰흙과 교통 등의 입지 조건이 좋아 1885년에 선산 출생의 손영기(1864-1948)에 의해 시작된 후 옹기공장이 5, 1960년대에는 옹기굽는 큰가마가 7개가 될 정도로 크게 흥하였으나, 1970년대 들어 플라스틱 제품이 나오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냉정골(冷井一)은 냉정산 밑에 있는 마을로 찬 샘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하늘원 장례식장 옆 골짜기이다. 맷골(鷹洞), 매골, 약수촌(藥水村)은 광대원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뒤쪽 갈부재가 마치 병아리를 채어 가는 매의 형상을 하고 있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다.

 

 

또한 이 마을에 의 기지(基地)가 있어서 매골(鷹谷)이라고 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18가구 102명이 거주했으나 현재는 2가구가 살고 있다. 매골은 윗마을과 약샘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샘은 물맛이 좋고 매우 차며 이 물을 먹으면 피부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데, 여름철 땀띠나 옻이 오른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약샘옆에는 100여년이 넘는 향나무가 있는데 수형이 좋아 도난예방을 위해 울타리를 두르고 CCTV를 설치하는 등 보존하고 있으며 약샘은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전성기 약샘마을에는 11가구가 거주했으나 지금은 차광수씨 혼자 살고 있다. 맷골은 보문면 승본리, 통명리 땅골과 접해 있다.

 

 

석명환 이장은 우계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예천 토박이다. 석 이장은 20076월에 마을 주민 합의 추대로 이장에 선출되었으며 성실한 자세로 각종 민원 및 불편사항 해결을 위해 발로 뛰며 적극적으로 봉사 하는 등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석 이장은 벼농사(1ha)와 기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참고자료] 우계리 역대 이장 연혁(沿革)

재임기간

성 명

1979. 4. 1 ~1986.12.17

박명식(朴明植)

1986.12.18. ~ 1995. 2.20

김철(金哲)

1995. 2.25 ~ 1998. 2.25

이선진(李善鎭)

1998. 3. 6 ~2003. 3.10

김철(金哲)

2003. 3.11 ~2007. 6.27

권태수(權泰守)

2007. 6.28 ~ 현 재

석명환(石明煥)

 

 

2011년 군정발전(군수) 유공 표창을 받은바 있는 석 이장은 영농회장(황상대 57), 새마을 지도자(김상용 60), 새마을 부녀회장(윤미정 62), 우계리 경로당 노인회장(이수석 82), 광대원 경로당 노인회장(구진숙 83), 14개 반장 등 마을 운영위원들과 각종 행사시 사전에 상의하며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우계리는 2개의 경로당이 있으나 별개 회원이 아닌 중복되는 회원이 많다. 이는 양 경로당 식사, 행사시에 같이 참석 하며 하나의 마을로 화합을 유지하며 운영되고 있어 경로당별로 회원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는다.

 

 

우계리 마을 변천사(變遷史)를 살펴보면 195854H구락부(단체) 창립, 9월 우계동농업협동조합 창립, 19604월 마을회관 신축 및 구판장 개장, 19621월 지역사회개발계가 창립, 19626월 도정공장 준공, 19634월 기와공장 준공, 196312월 이발관 개업, 19647월 밀알학원(야학당) 개원 했다.

 

 

19654월 포푸라 묘포장 설치, 5월 반별은행을 창립하여 현물저축운동 전개, 19657월 펌프수도샘 20개소 설치, 196510월 양돈센타 창설, 196510월 개량축사 27개소 신축, 196512월 원촌~약수촌 사이 교량 준공, 19662월 자선회 창립, 196711월 마을문고 설치, 19676월 부녀구락부 생활개선 활동상이 국민신문에 크게 소개됐다.

 

 

이후 1973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지구로 총공사비 1억원으로 아담한 마을로 변모하였다. 1979년에는 새마을 주택을 건립하며 문화생활을 하는 등 우계리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된 1970년 이전부터 이미 마을 자체적으로 열심히 잘살아 보겠다는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마을 회관 연혁을 살펴보면 우계리 경로당은 1975, 광대원 경로당은 2010년에 준공됐으며, 광역상수도는 1970년대에 연결됐다. 우계리의 자랑스런 출향인으로 5대 구미시의원, LG디스플레이 노동조합위원장을 지낸 석호진씨(56)가 있다.

 

예천농고~경일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과정 경영컨설팅학과 졸업한 석 위원장은 2014년 경일대학교 명예박사학위, 1993년 품질명장(대통령), 2004년 수출 200억$ 달성 대통령 표창, 2008년 석탑산업훈장, 2008년 예천군민상(사회봉사부분), 2012년 경상북도 자랑스런 도민상(특별상), 2013년 자랑스런 구미사람 대상(구미시)을 수상했다.

 

석 전 위원장은 2005LG Philips LCD 노조지부장, 2006년 제5대 구미시의회 의원(산업건설 분과 위원회), 2011LG Display 노조위원장, 2012년 한국노총 전국금속연맹 수석 부위원장, 2012년 새누리당 경상북도당 부위원장, 2012년 경일대학교 경영학 겸임교수, 국제개발구호 더프라미스 홍보대사(구호단체)를 역임했다.

 

석 전 위원장은 고향 예천에 매년 생활이 어려운 가구와 경로당에 물심양면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예천세계곤충엑스포 후원, 후진 양성을 위한 예천군민 장학금 지원, 수용시설 지원 등 고장발전과 고향 예천을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며, 잊지 않고 꾸준하게 고향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고 있어 우계리 마을의 자랑스런 출향인으로 자자한 칭송을 받고 있다.

 

석 이장은 재임기간 중 경로당 신축에 대한 주민여론이 꾸준히 제기 됨에 따라 마을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주민들의 십시일반 동참을 이끌어내며 2010년 광대원 경로당을 준공했다.

 

이로 인해 넓고 깨끗한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장소 제공은 물론 마을 회의 및 다양한 여가활동이 가능해 졌다. , 광대원 앞 하천 정비사업을 3년에 걸쳐 완공하여 재해예방에 힘쓰고, 농로포장, 배수로 정비등 농업기반시설 정비에 주력하는 등 이장 재임 기간 동안 주민들의 불편함 해결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석 이장은 "마을이 크고 성씨도 달라 주민들 앞에서 늘 첫째도 화합 둘째도 화합이라고 강조하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웃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행복한 우계리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다.

 

어쩌면 우계리는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일컬어도 될 정도로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잘사는 마을을 만들겠다는 마을 운동이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이제는 정신 문화 운동으로 승화시켜 정든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더 살기 좋고, 살고 싶은, 이사 오고 싶은 마을로 만들어 나가겠다며 힘주어 말하는 석 이장의 표정에 여유와 자신감으로 가득 넘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