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 시대에 맞춰 예천군청사 이전을 계기로
대심1리가 예천의 관문역할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차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이
가까이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에 있는 대심1리(大心1里)는 경북신도시 개발과 예천군청사 이전을 계기로
새로이 부상(浮上)
받고 있는 마을로 도시화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마을 이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알고 있는 박노호 이장(65)의 다부진 일성이다.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5분(2.0km)
거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서본2리,
서쪽으로
대심2리,
뒤로는 봉덕산이 앞으로는
예천역(서본2리)이 경계를 이룬다.
서정자들은
대심2리,
서본2리 구역에 들어감으로 대심 1.
3리는 농경지가
없다.
대심1리(大心1里)는 예천여고~석정간 도시계획도로,
주공아파트~예천역간 4차선 대로,
아파트 밀집지역 소로 등
사통팔달 도로가 연결되면서 대심리 일대는 예전의 변두리에서 군청사 이전과 함께 새로운 신흥 주거지역으로 인기를 끌며 아파트,
원룸 등 주택이 많이
들어서고 급격한 인구유입으로 대심1,
3리는 현재 분동 계획에
있다.
주요시설로 예천시외버스
정류장,
교회(예천제일,
예천서광,
하늘빛),
사찰(서악사),
어린이집(꿈동산,
피노키오,
룸비니유치원),
모텔,
편의점,
미용실 등 상가가 있고
아파트,
원룸 밀집촌으로 변하고
있다.
시외버스 정류장은 기차역 앞에 있으며 예천의
관문이다.
원래
서본1리 예천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것을
1980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터미널내 매점은 이전
당시에는 8개 점포 였으나 승객감소로 지금은
2개소(유천상회 임오규,
구매상회
김영섭)만 영업중인데 매출이 적어 폐업 기로에 서
있다.
시외버스 노선도를 살펴보면 서울 직행
14회,
대구 직행
8회,
부산
1회,
마산
2회,
포항
5회,
수원(충주)
3회,
대전
5회,
김천
17회,
구미
5회,
태백
3회,
청주
6회,
점촌
42회,
안동
22회,
영주
19회 등이 운행되고 있으나 서울과 대구를 제외한
노선은 완행과 같아서 시간이 오래 걸려 이용객들이 불편을 느낀다고 하겠다.
대심리는 아파트 밀집촌으로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 서본2리 로얄모텔 1층에 있던 '이상호 정형외과'가 노하리 읍사무소 앞으로
이전했다.
약국은 시외버스터미널안에
다나약국이 있었으나 병원이 없어진 후 폐업되어 현재 대심리(1~3리)는 병의원과 약국이 없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대심1리(大心1里)는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 마을에서 여러 성씨가
사는 도시 형태로 변했으며,
711가구(19
개반)에 1,849명(남자 919명,
여자
930명)이 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254명(65세 이상 14%)으로 평균연령이 아주 젊고,
주민 중
전업농가는
206가구(29%)
이다. [참고자료]1978년 인구현황 320가구 1,690명(남 857,
여 837)최전성기
예천읍 대심리는 예전에 마을 주변이
논,
밭으로 전형적인 농촌취락
형태였으나 외지 인구 유입으로 전통적인 농촌형태가 사라지면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지역이다.
대심리는 한뿌리였으나
인구수를 고려하여 3개 행정동으로 분동되었기에 굳이 리별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현재의 대심 1~3리 경계는 토지 지번에 의한 것으로 들쑥날쑥하여
주민들은 里경계를 정확이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새주소 도로명에
따라 찾기 쉽도록 里경계를 제조정해야 할 것이다.
里경계 조정은 대심1리가 대심4리로,
대심3리가 대심5리로 다시 분동계획에 있어 이러한 불편함은 같이
개선할 예정이다.
현재의 도로와 건물 기준으로 대심리를 구분한다면
1리는 시외버스 터미널 우측
옆길(예전의 주도로)을 따라 태정주택,
덕흥장미아파트,
로얄아파트,
스카이파크,
위브빌,
서악사,
봉덕산,
산장빌라,
아이빌,
문화연립,
극동아파트,
백호체육관,
웰빙타운,
N모텔 상가건물까지
이다.
대심2리는 대창주유소부터 석정리
경계까지이며,
대심3리는 리마트,
대심빌라,
삼우목련아파트,
주공아파트를 경계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리별 경계가 복잡한 대심리 마을 면적을
1,2,3리로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기에
대심1리에 일괄 표기한다.
다만 농경지는
대심2리에 거의 포함된다고 보면
된다.
마을 면적은
3,228,260.2㎡(전 530,795㎡,
답 914,238.1㎡,
과수원
3,888㎡,
임야
726,183㎡)
이다.
대심리(大心里)는 본래 예천군 서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무동(大茂洞),
흘증동(屹曾洞),
홍심동(弘心洞),
신당면
하리(下里)일부를 병합하여 대무동(大茂洞)과 홍심동(弘心洞)의 이름을 따서 대심동(大心洞)이라 하여 예천면에 편입됐다.
1937년 예천읍 대심동(大心洞)이 되고,
1952년
11월 1일 행정 운영 설치로 1,
2동으로 분동되고
1988년 洞이 里로 개칭되었고,
1990년
대심1리에서 대심3리가 분동 됐다.
대심1리는 큰하무실 자연부락명 하나만
있다.
유래를 살펴보면,
하무실(大母谷),
한모실
대무동(大茂洞,
大母洞),
큰하무실은『상재봉(上材峰)
밑에 있는 무덤이 장마로
인하여 그 봉분이 붕괴 되자,
"소벌국왕
모후분(小伐國王
母后墳)"이라는 지석(誌石)이 노출되어,
이 곳을
대모골(大母谷),
또는
대총골(大塚谷)이라고 하였는데,
그중
大母가 대무(大母)가 되고,
대무가 한무가
되고,
한무가 하무실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참고자료]
자연부락명
:
대심1리 ⇒큰 하무실,
대심2리 ⇒
홍심이,
이미기,
흙진개,
무리실,
대심3리 ⇒
작은
하무실
박노호 이장은 1993년 당시 40세의 젊은 나이에 새마을지도자로 선임되어
22년간 마을을 위해 헌신봉사하다
2015년 3월 26일 마을주민 합의 추대로 이장에
선출됐다.
박 이장 윗대 선조들의
고향은 용문면 상금곡리이며 김천에서 태어나 초등6년때 예천읍 대심리로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참고자료] 대심1리 역대 이장 연혁
재임기간 |
성 명 |
1974.04.10 ~ 1987.01.31 |
안영진(安榮鎭) |
1987.02.01 ~ 1990.03.15 |
노진수(盧鎭洙) |
1990.03.16 ~ 1995.04.10 |
박기태(朴基泰) |
1995.04.22 ~ 2015.03.25 |
노진수(盧鎭洙) |
2015.03.26.
~ 현재까지 |
박노호(朴魯鎬) |
박 이장은 새마을예천읍협의회 회장을 역임하며 생활
형편이 어려운 이웃 헌집수리,
농촌
일손돕기,
환경대청소
활동,
새마을 기금 마련을 위한
휴경지 경작 등 우리 지역사회를 위한 각종 봉사활동에도 앞장을 서왔다.
2008년 새마을봉사 유공(장관)을 비롯해 새마을 유공(군수)표창을 여러 차례 받은 박 이장은 몸에 밴 근면
성실한 새마을 정신을 바탕으로 마을 곳곳을 누비며,
생업활동(대동식품)
외에 주민들의 불편함과
민원 등을 직접 해결하느라 늘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대심1리(大心1里)는 박 이장(영농회장 겸임),
새마을
지도자(김광식 57세),
부녀회장(김춘자 58세),
대심1리(남)
노인회장(유일호 81세,
회원
27명),
대심1리(여)
노인회장(이정분 83세,
회원
29명),
덕흥장미아파트
노인회장(박희순 77세,
회원
30명)
등 마을 운영위원들이 각종
행사시 서로 의논하고 협조하며 큰 불협화음 없이 마을의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운영하고 있다.
마을 공사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마을 회관은 1978년에 사업비 350만원으로 건평 52평을 건립했으나 2004년 10월경 매각하고 2005년 445-8번지에 여자 경로당을 신축
했다.
남자 경로당은
1997년에 447-1번지에 신축 대심1리 사무실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회관 주 진입로(태정주택 앞 길)는 1984년 사업비 300만원에 연장 131m로 포장했다.
광역 상수도는 1970년대에 연결됐다.
대심1리 마을유지로는 대한노인회 예천읍분회장을 역임한
박종환(84세)씨와 이현준 예천군수(민선 5~6기)가 있다.
마을의 자랑거리로
대동회(大同會)는 대심리 거주자로 구성된 단체로 현재
25명의 회원(회장 이종원)이 활동하고 있다.
경로당 유류비 지원(연 1회),
물품
기증,
마을행사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대심1리 번영회는 40명의 회원(회장 권종항)이 활동하고 있다.
마을
청소,
경로잔치,
마을 윷놀이
지원,
마을행사 봉사활동 등을
하고 있다.
박 이장은 현재 대심1리의 숙원사업을 묻자 여자 경로당
2층을 증축하고 경로당 어르신들의 건강증진을 도모
할 수 있도록 체력단련실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대심1리(大心1里)에 흩어져 있는 자연 문화재를 살펴보면
서악사(西岳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
대심1길 160)는 1960년 요사채를 중수할 때 발견된
3통의 상량문에 의하면 강희(康熙) 40년 신사(1701
조선 숙종
27년)에 창건 되었다.
건융(乾隆)
2년
정사(丁巳)(1737
영조
13년)에 옮겨 지은 바 있으며,
건융
26년 신사(1761)에 상량,
동치(同治)
9년
신미(辛未)(1871)에 다시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악사(西岳寺)
창건과 관련 두가지
밝혀지지 않은 설이 전해져 온다.
서
악사(西岳寺)는 지금의 대심2리 천주교 묘지 뒤 골(谷)에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절이 폐사되고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또 하나는 창건연대가
강희(康熙)
40년
신사(1701
조선 숙종
27년)이 아니라 신라 신문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說)
이다.
창건 관련 이 같은 설은 폐사직전의 서악사를
지금의 규모로 크게 중창
(重創)한 성태(成太)스님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애초 창건연대를 증명하는
탱화 3점이 반출되어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이를 증명하는
길이 어렵다고 하나 서악사에 20여년간(1987~2004년)
계시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重創)하며 창건 관련 유래를 밝히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나름 확신을 갖고 있지만 기록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성태(成太)스님은 대심2리에서 옮겨 지은 것이
아니며,
옛날 서악사 자리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고 봉덕산 정상부
토굴에서 스님이 수행했다고 한다.
서악사는
1987년 중수(重修)할 당시 법당인 원통전과 요사채
2동만 있는 암자 규모의 작은 절이었고 거의 폐사
직전의 건물이었다.
이에 1987년 주지로 부임한 성태스님이 직접 중장비를
운전하며 바위를 깨고 오솔길은 큰길로 확장하고,
골짜기는 철근콘크리트
옹벽으로 쌓으며,
대웅전(1989년),
설법전(1991년),
응향전(요사채 1992년),
종각(1992년),
산신각(1992년),
낡은
법당(원통전)을 허물고 종무소(1994년)를 지었으며,
룸비니유치원과
천불전(1996년),
나한전(2003년)을 새롭게 중창해 비로소 지금의 사찰다운 큰
규모로 갖춰지게 됐다.
산신각은 기울어져
붕괴우려가 있는 것을 2009년 부임한 세관스님이 2016년 새로 지었다.
초창기 법당인 원통전 관련 문헌 내용은 현재
법당이 없어졌기에 기록에서 삭제코자 한다.
다만 원통전에 모셔져 있던
6축의 탱화 중 현재
석가모니후불탱화(이조말엽)
하나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외부로 밀반출 된 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대웅전은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입상,
자장보살입상이 나한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
사보(寺寶)로 1933년에 주조(鑄造)된 동종이 대웅전에 있는데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이 밖에 종각 입구에 있는
연파독역산(蓮波讀易山)이라 음각된 암석은 사찰 뒤편 봉덕산에 안장된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
1853~1938)(仁同)이 이곳에서 역경(易經)을 강독(講讀)하던 곳이라 하여 후손 기생(基生)이 썼다.
현재 서악사 범종(梵鍾)은 주지 권성태(權成太)스님의 원력(願力)과 총무 김묘성(金妙性)씨를 비롯한 불자들의 성원(聲援)으로 불기2538년(1994년)
양력
7월7일 불사(佛事)했다.
종각에는
범종(梵鍾),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있다.
1841년(헌종 7)과 1895년 편찬된 (예천군지)에는 '서암(西庵)은 군에서 서쪽 8리에 있다'는 구절이 나와 서악사는 한때 서암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운대암(雲帶庵)이라 했다고도 전해져 온다.
1934년에 예천군수
소진하가 예천군 동서남북에 절을 짓거나 중수하고 군민의 평안을 기원하였는데 이때 서쪽에 위치한 사찰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군민의 평안을 기원하며 세운 예천의
사악(四岳)중 남악사(南岳寺)는 남본삼거리~왕신리,
북악사(北岳寺)는 용산리 부근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멸실되고
서악사(西岳寺),
동악사(東岳寺)만 남아 있다.
서악사로 올라가는 입구 우측에는 서악사 사적비가
2003년 세워졌으며,
서악사 뒷편 산신각
주변에는 큰 기암이 많고 숲이 우겨져 있다.
서악사(西岳寺)
현재 신도는 600여명으로 신도회장은 윤무진행(윤복선)이다.
(주지
세관스님,
010-8536-5971 / 655-1001)
고분군(古墳群)은 대심리 큰하무실 뒤(스카이뷰 아파트 뒤)
봉덕산 정상 등산로를 따라
석정리로 이어지는 주변에 삼국시대 고분이 있다.
현재 고분군은 거의
도굴되고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형체를 잘 알 수 없으나,
능선을 따라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면 방치된 고인돌 고분 몇 기를 볼 수 있다. [참고자료 :
고분군
안내판]
이 일대는 1,5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옛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대심리 고분군 지역입니다.
이 고분군은 예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으로서 군민 모두가 보존하여야 할 자산입니다.
현재 경작지 외에 무단으로
토지의 형질을 변경하거나 훼손·도굴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009. 6 예천군수
고분군 안내판은 예천군에서 2009년 6월에 설치했으며,
이 후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복구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체 방치되고 있어 안내판 주변에 어떤 고인돌 고분이 있는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참고로 안내판 뒤편에 있는
것은 고분군이 아니고 예비군 참호이다.
등산객들이 이를 잘 모르고
착각하는 일들이 종종 있기에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봉덕산(鳳德山
373m)은 소백산과 도솔봉을 지나온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곁가지를 일으키는 백두매봉백마단맥 구간에 솟은 산이다.
동으로 예천읍
진산(鎭山)
흑응산을 이루고 서쪽으로
석정리 뒷산,
유천면 성평리에 이르며
북쪽으로 백마산,
매봉을 지나 백두대간과
연결된다.
산 정상부 주변의 조망은
그 높이에 비해 과히 장관을 이룬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산세가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학과
같다'하여 붙여진
학가산(鶴駕山
870m)의 웅장함이 한눈에 펼쳐지며 예천양수발전소
상부댐,
문경
천주산,
운달산,
황정산,
소백산,
신도청 소재지의 주산인
검무산을 비롯한 주변 산세의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 하다.
봉덕산의 유래는 사벌국(沙伐國)의 왕족들이 이 산줄기의 밑에 있는
왕후능(王后陵)에 와서 제사 참례를 할 때,
능의 뒷산을 보고
봉덕산(鳳德山)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온다.
정상부는 예천군에서 실시하는 해맞이 행사 장소이며
산불감시초소를 비롯해 돌탑,
삼각점이 있으며
예천기독신우회에서 의자,
예천불교정법회에서 대형겨울
등 편의시설물을 설치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또 주변에는
철쭉,
연산홍 꽃이 심어져 있어
매년 봄이 되면 봉덕산은 붉게 타오르며 상춘객들의 가슴에 꽃불을 지피고 있다.
봉덕산,
백마산 일원은
6.25
전쟁때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인 격전지로 지금까지도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또 정상부에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대감 묘가 있다.
흑응산에서 봉덕산 등산로
구간은 여러 경로가 있으며 많은 군민들이 건강을 위해 봉덕산을 찾고 있다. [참고자료 :
봉덕산~백마산 전투 안내판]
이곳은 6.25
전쟁 당시
1950년 7월 14일부터 7월 16일까지 전개된 봉덕산~백마산지구 전투에서 군과 경찰로 혼합 편성된 국군
8사단 21연대 예하 혼성대대와 북한군8사단 예하 규모 미상의 적이 대치하여 격전 끝에
북한군으로부터 우리 고장 예천을 지켜냈던 호국 용사들의 魂이 깃든 장소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전선 구축을 위한 시간확보에 기여하며 장차 6.25전쟁의 전세 역전을 위한 국군이 북진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 할 수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自由,
平和,
護國의 일념으로 우리고장 예천을 지켜내신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그 정신을 받들어 후대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소중함과 나라사랑 정신을 우리 모두가 고취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알림판을 세웁니다. 2016. 2.16.
봉덕산에서 서악사로 하산은
약10여분이 소요되며,
서쪽(석정리)방향으로 10여분을 걸으면 돌무더기와 함께
'서암산
봉수대'라고 쓴 표석이
나온다.
서암산(서악산)
봉수대(熢燧臺)는 감천 포리 봉수산(할미성)
봉수대,
용궁 비룡산
봉수대,
풍양 풍신리 소이산
봉수대,
유천 고림리 봉수산
봉수대,
지보면 대죽리 봉수재
봉수대와 함께 국경에서 일어나는 변란 또는 내란의 일을 신속히 중앙에 알리는 옛 비상경보통신 수단으로 이용됐다.
[참고자료]
봉덕산 등산로 안내
•대창중고 운동장→흑응산→산신당→봉덕산→봉수대→봉화산→임도
→헬기장(초소)→손기리 (약 10km
4시간
소요)
•대창중고 운동장→흑응산→산신당→봉덕산→서악사→산신당→흑응산
→대창중고 운동장 (원점회귀산행 2시간 소요)
•용산리 백룡사→백마산→봉화산→봉덕산→흑응산→대창중고 운동장
(4시간 소요)
대심리는 지금 격변기의 중심에 서
있다.
2017년
12월이면 예천군 청사가 대심리로 이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박 이장은 예천군청 이전과 맞물려
대심1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경북신도시 개발과 함께
예천이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대심1리 번영회가 주축이 되어 마을 주민들의 힘과 뜻을
모아 잘사는 예천읍 대심리로 만들어 나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앞으로 대심리는 '기회의 땅',
'희망의
땅',
'미래의
땅'으로 예천의 새로운
천년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예천이
1960년대 상권의 중심지였던 것처럼
대심1리가 새로운 예천의 관문역할을 해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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