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무적 해병의 정신으로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밝고 건전한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겠습니다." 마을 치안유지와 주민들의 손발이 되어 주는 것은
물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불굴의 해병대 출신 동본2리(東本2里)
이한육
이장(57)의 당찬 일성이다.
예천읍 중심지에서 동남방향(보문)
약 2.0km
지점 국도
28호선에 접해 있는 동본2리는 예천군농업기술센터,
예천군
보건소,
청소년
수련관,
예천공설운동장,
실내육상훈련장,
학생
실내체육관,
공설테니스장,
군민탁구장 등 공공시설을
비롯해 요양시설,
정비공장,
식당,
고물상 등이
있다.
마을 면적은 334만58㎡에 달하며 5개반의 산재부락(도덕골,
돌고개,
옥반골,
양정이,
큰원골,
작은원골)으로 구성되어 있고,
129가구에
278명(남자 141명,
여자
137명)이 거주하며,
전업농가는
46가구(36%)이다. [참고자료]1977년
인구현황
103가구
561명(남
299,
여
262)
동본리(東本里)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본동(本洞),
원동(院洞)일부를 병합하고 동읍내면과 본동의 이름을 따서
동본동이라 하였으며 1971년 1월에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동본2리(東本2里)는 내성천(乃城川)의 서안(西岸)에 발달한 평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동본2리(東本2里)
자연마을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공설운동장 옆마을은
한천변에 있는 마을로 농업기술센터와 공설운동장
사이에 조선시대 동읍 내면의 치소가 있었다.
도덕골(道悳洞,
道德洞),
도득골(道得洞),
장자동(長者洞)은 공설운동장 남쪽에 있는
마을(현 인도사 주변골)이며,
18세 기에 어느 도사가
마을뒤의 바위 위에서 수도하여 득도(得道)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도덕골(道德谷)이라 불리어진다.
또 부자가 살았다고
장자동(長者洞)이라고도 한다.
현재 인도사 입구에는 도덕골(道德谷)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비는 남을 비방하기
좋아하는 호사가(好事家)들에 의해 '도둑골'이라고 불리어 지는 잘못된 지명유래를 바로 잡고자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이곳 지세(地勢)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보경(남,
73세)씨가 1992년 8월에 자비로 세웠다.
도둑골이라 불리우게 된 연유는
6.25
전후에 피난민들이 골이
깊은 이곳으로 숨어들며 개를 잡아먹었다고 해서 '도둑골'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하는데 필자는 각종
자료에 잘못 전해져 오는 도덕골 지명 유래를 이 기회에 바로 잡고자 한다.
돌고개(石峴),
돌꼬지(石串,石串村)는 돌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1592)때 明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보낸 지사(地士)가 이 곳 지형이 큰 인물이 태어날 곳이라 하여
군사들을 시켜 큰 바위를 깨트리고 혈을 잘랐다고 하며 그 뒤 이 근처 사람들은 깨트린 바위 위에 성황당을 마련하고,
길가는 사람들이 돌을 던져
행운을 빌었는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전하고,
지금
동본교(東本橋)
자리에 내건너까지 바위가
물 가운데 쪽 깔려 있어서 돌꼬지라고 하였다.
현재 이곳은 공설운동장 네거리로 도로가
4차선으로 확포장 되면서 돌고개의 형상을 상실했으며
고물상(돌고개 자원)이 그나마 지명을 알리고 있는데 유래를 알 수
있도록 안내판을 세웠으면 한다.
양재이(羊暘山),
양정이,
양짓골(陽地谷),
양촌(陽村)은 도덕골(인도사 주변)에서 동쪽 보문통로를 가다가 돌고개 근처에 있는
양지 바른 마을로 18세기 초에 이곳에 엽전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옥밖골(獄外洞),
옥반골(玉盤谷),
오빠골은 옛날에 감옥이
있던 자리인데,
그 감옥 터 밖에 있는
마을 이란 뜻으로 옥밖골이라 불린다고도 하며,
또 마을 뒷산이 선녀가
옥을 은쟁반 위에 굴리는 형국이라 하여 옥반골이라고 한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선녀가 옥을
갖고 놀다 떨어뜨렸는데 그 자리가 천하의 명당터이며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
옥반골은 골이 깊고 암릉이
많으며 골짜기는 용화사를 지나 냉정산으로 이어지며 옥반골 못안에는 바위가 있다.
원골(院洞),
큰원골(大院洞)은 돌고개 마을 남쪽 등너머에 있다.
고려때부터 있었던
통명역(通明驛)
가까이 여관이 있던
곳이다.
이 동네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과 산이에는 논이 층층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업인 ㈜토성산업(골재)을 운영하고 있는 이 이장은 해병대 제대후 마을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눈여겨 본 마을 주민들에 의해 지난 1994년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만장일치로 이장에
선출되었다.
사업상의 이유로 3년 쉰 것을 제외하고 마을 총회에서 재추대 될 정도로 주민들의 두툼한
신임을 얻으며,
지금까지 마을 주민들을
위해 20년째 봉사하고 있는 이 이장은
동본2리가 안태고향(安胎故鄕)으로 태어나서 지금껏 타지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진정한 동본2리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이장은 재임하면서 농로 확포장과 가로등
설치,
마을 안길 정비사업 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정주여건 개선으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동본2리 마을 공동 창고는 1975년 대통령 하사금 226만원으로 50평 규모의 건축물을 건립 했으며 이후
폐지,
고물 등 자원재활용 판매
수익금과 주민 성금 등으로 2008년경 건물 대지 소유권 등기 이전을 완료
했다.
마을 회관은
1979년 자조마을로 승격,
120만원과 자체기금으로
20여평의 건축물을 건립했으나,
보문선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1999년경 철거 되었다.
현재 창고는 개인에게 임대를 주고 있으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으로 마을
경로잔치,
윷놀이
행사,
불우이웃돕기 등 각종
행사를 큰 어려움 없이 치르고 있다.
동본리 청소년 수련관 옆 한천변에 있는 동본
양수장은 1979년 사업비 2천만원으로 완공했으며,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리던
양정이,
작은원골,
통명들,
고평리 금마들이 양수장
개통으로 수혜를 보는 지역이다
각종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는
동본2리는 체육 웅군 예천의 성지(聖地)요 요람(搖籃)이라 할 수 있으며 사찰이 3곳이나 있어 문화재의 보고(寶庫)와 같은 마을이다.
동본리와 우계리에 걸쳐
있는 냉정산(冷井山
191m)은 약수로 유명한 찬샘(冷井)이 있었다고 하며 이 산에는
동악사(東岳寺)와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동악사(東岳寺
대한불교
조계종,
동본리
171-1)는 671년(신라 문무왕 1)
의상 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한 뒤 창건하였는데,
동악사 인근의 지형이
학(鶴)을 닮았다고 해서 처음에는
동학사(東鶴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동악사(東岳寺)는 본래 동서남북 사악(四岳)에 있던 절 가운데
하나였으며,
사악 사찰 중
서악사(西岳寺)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곳이었다고
하나 사악중 남악(南岳),
북악(北岳)의 흔적은 알려진 것이 없어
안타깝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1934년 중창할 때 신도들의 시주로 세운 보광전과
요사체가 있다.
보광전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된 유물로,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좌상 뒤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는데,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그려 놓았다.
요사 앞에는 석탑재가
있으며,
주변에서 옛 기와가 많이
출토 되었다.
(동악사
054-652-1212)
용화사(龍華寺
대한불교
용화종,
동본리
165-1)는 전주시 소재 원각사(圓覺寺)를 본사(本寺)로 하는 용화종(龍華宗)의 말사(末寺)이며,
원래
백전2리 산 426번지(능골)
평산
申씨들 재사에서 북서쪽 봉덕산 도달봉 산중턱에
있었다.
용화사의 창건 유래를 살펴보면 예천읍 왕신리의 권
선생이 건강상 능골에 초가 1각을 세우고 수양을 하고 있었는데 글을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하나 둘 찾아 들면서 처소를 넓히고 1935년 금북골(깜부기골)에 있었던 금고사라 전하는 절터에 방치된
석조미륵불좌상(石造彌勒佛坐像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모셔 봉안(奉安)하고 용화사(龍華寺)를 창건했다. [참고자료]금고사는 통일신라시대
있었던 사찰로
화재로 소실된 후
절터는 방치 되었으며 지금은
새벽 흑염소 농장이 있다.(용산2리
424)
용화사는 법용스님이 25세 되던 당시 예천에 탁발을 왔다 빈절이 있다고
하여 기거하게 되었으며,
1949년
5월에 산신각을 건립하였고 1963년 3월부터 1971년에 까지 여러차례 법당을
중수(重修)하고 요사체를 건립하는 등
불사(佛事)를 거듭하다 진입로가 좁고 자재운반이 어려운 등
중창불사가 난관에 봉착하게 되자 1992년 6월 현재의 장소인 냉정산(冷井山)
옥반골로
옮겼다.
이후 같은 해에 법당
대자보전(大慈寶殿)을 기공(起工)하여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94년 완공했고,
1995년 요사체
1동,
1996년
설법전(說法殿)과 식당,
종각을
건립(建立)하는 등 불사를 거듭 하던 중 건강악화로
2002년 입적(入寂)했다.
용화사 창건(백전리)
초기
사미승(沙彌僧)이었던 이천호 스님은 법용스님을 은사로 모셨던
상좌(上佐)로 입적 후 용화사 2대 주지(화주)로 임명되었고 법당 안과 밖
단청작업,
3층
석탑,
산신각
건립,
종각 밑 좌우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모시고 사찰 주변 석축 쌓기 및 주변정비를
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갖추어졌다,
화주 스님의 열정적인 포교활동으로 용화사는 현재
신도가 5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2014년 11월 대자보전(大慈寶殿)에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모셔와 봉안(奉安)했다.
(주지
010-6529-2005
/ 654-4925) [참고자료]사미승(沙彌僧)이란 정식의 승려가
되기 위한 구족계(具足戒)를 받기 위하여
수행(修行)하고 있는 어린
남자승려를 이른다.
양장산(羊膓山)
도덕골에 자리잡은
인도사(引導寺
대한불교
태고종,
동본리
245-1)는 1980년대 초 법사 김성호씨가 창건했으며
1991년 법성(강대규)스님 부임 후 대웅전,
종각 등을 불사했고 불기
2539년(1995년 음 8월21일)에 한국·스리랑카 국제불교 문화교류차 스리랑카 마인드라사원
주지 찬다스리 대 승정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를 기증 받아 인도사 5층 석탑에 봉안(奉安)
했다.
인도사에는 대웅전,
산신각,
용왕전,
종각,
요사체가 들어서
있다.
법성 스님의 열정적인
포교활동으로 인도사는 현재 신도가 3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사찰 뒤편 양장산(羊膓山)의 송림은 법성 스님이 매년 풀과 잡목 등을 제거
하면서 관리하여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주지 010-3533-2387
/ 654-2388)
2002년 모범이장(군수),
2007년 엑스포
유공(군수),
2009년 자연환경
보전유공(도지사)
등 여러 표창을 받으며
마을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이한육 이장은 해병대 예천군 전우회(전 회장),
예천군지역자율방재단(부단장),
자연보호 예천군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인명구조와 우범지역순찰,
각종 행사 때 고무보트
무료체험 및 교통정리,
자연재난 대비 안전사고
예방 활동,
자연정화
활동,
야생조수 보호
활동,
외래종 생태계 교란 식물인
가시박 제거 작업 등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왕성한 봉사활동을 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을 경로당내 홍보 게시판에 주민들에게 유용한
정보와 군정 홍보 자료를 수시로 교체하는 등 매사에 빈틈없이 마을 일을 처리하며 주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한육 이장은 남은 임기
동안 주민들의 화합과 소통으로 밝고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경로당이 되도록 맡은바 최선을 다해 소임을 수행하겠다는 각오를 피력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