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내실 마을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마을문화재가 많았던 곳으로 지금은 잊혀진 소중한 문화자산을 스토리텔링화 하여 특색 있는 마을로 만들고 싶습니다."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전설이 살아 숨쉬는 생천리(生川里)
임장오
이장(69)은 작지만 소박한 포부를
밝혔다.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5분(3.0km)
거리 지방도
928(용문선),
927(은풍선)호선과 접해 있는 생천리는 용문면과 경계를 이루는
예천읍의 외곽지로 육군
제3260부대 2대대 예천대대(대대장 이동섭),
신일벽돌공장(생천리 361),
우리옹기대리점(010-3533-0878),
한옥전원주택
단지(7가구 거주)가 있고,
136가구(9개반)에 281명(남자 146명,
여자
135명)이 살고 있다.
[참고자료]1977년 인구현황 136가구 801명(남 387,
여 414)
최전성기
자연마을로는 생내실,
나붓들,
솥골(부대위),
서원마,
못골,
양갓,
천내 등이
있고,
반남朴,
평해黃,
안동金,
경주李,
안동權,
경주金씨를 비롯해 崔,
鄭,
趙,
全,
林,
張,
裵,
吳,
禹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 마을이다.
마을 면적은 4,589,143.7㎡(전 552,092㎡,
답 978,688.5㎡,
과수원
68,154㎡,
임야
2,181,994㎡)에 달하며,
주민 중 전업농가는
74가구(54%)이다.
주요 특산물은
사과,
양잠,
고추,
고구마
등으로,
생천리의 양잠업은
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으나 지금은
4가구가 종사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104명(76%)으로 초고령화에 따른 농촌 일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천리(生川里)는 본래 예천군 북읍내면의
지역으로서,
구릉성 평지에
7개 마을이 터를 잡은 마을로 소규모의 경지가
분포하며 금곡천과 한천이 마을을 감싸 흐르는 곳이다.
앞 냇물이 늘 소리를 내고
흘러서,
마치
생황(笙簧)소리와 같다 하여 생내실 또는
생나실,
생천이라
했다.
[참고자료]
생황(笙簧)이란 궁중 음악인 아악에 쓰이는 관악기로서
19개나 13개의 가는 대나무를 바가지로 만든 바탕에 묶어
세우고 주전자 귀때 비슷한 부리로 부는 것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나평동(羅坪洞
나붓들),
생천동(生川洞
생내실),
정산동(鼎山洞)을 병합하여 생천동이 되어 예천면에 편입되었고
1937년 예천읍으로 1988년 생천리(生川里)가 됐다.
생천리는 지명 유래와 그에 따른 전설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지역이다.
지면관계로 유래를 다
열거하지 못하고 이름만 나열해 본다.
낙모대(落帽臺),
늑대골,
다슴바우,
달우리고개(鷄鳴峴),
마흔아홉골,
맛들,
방구배깃골,
보지리(甫址里),
복상나무골(桃木谷),
부자송(父子松),
비석골,
샘골,
서당골,
소두방이,
솥뚜깽이쏘,
솔둥치,
송산네못골,
신골,
약대골,
예끼골(여우골),
옥골,
중간마(중촌),
진대골,
천내,
황새미
등이다.
생천리(生川里)
자연마을 주요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나붓들(羅坪,
羅坪洞)은 생내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반남朴씨들이 유천에서 1660년경에 첫 이주하여 지형이 나비가 드는
것(蝶蛾)과 같다하여 나부들(羅坪)이라 불렀다고 한다.
솥골(鼎谷)은 정산서원 터에 생긴 마을로
솥뚜껑이산(鼎蓋山)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군부대 마을)
동네 뒷산을 매봉산 또는
매봉재(288m)라 부르며 정월대보름날에 이 산에 올라가서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못골(池洞)은 생내실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앞에 못이
있고,
마을 뒤의 용문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용두고개(龍頭峴)라고 한다.
용두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용문사(龍門寺)는 용의 꼬리형인데 용문면 하금곡리로 넘어가는
용의 머리형인 용두고개(龍頭峴)의 돌을 깨어내며 도로 포장공사를 한 후 얼마
있지 않아 용문사에 큰 불이 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못골지 우측에 가장 높이 우뚝 솟은
육녀봉(六女峰
263m)은 용문면 제곡리쪽으로 뻗은
6개의 봉우리로 경치가 좋고 웅장하며 선녀와 얽힌
전설이 전해져 온다.
태고(太古)적에 6仙女가 하늘에서 경치 좋은 이 곳에 내려와서 놀다가
승천 시간을 잊어 승천하지 못했다.
그 이튿날도 경취에
심취되어 역시 승천하지 않고 놀다 얼마 후 승천하던 중 천국에서 하느님이 화가 나서 6선녀의 날개를 뽑아버려 6선녀는 그만 하늘에서 떨어져 이 곳에서 죽었는데
그 무덤을 육녀봉(六女峰)이라 했다.
또 옛날 중국에서 난이
일어나 황제는 전사하고 3명의 황녀(皇女)와 3명의 공주(公主)가 이곳에 피난 와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못골은 2007년 4월 27일 발생한 큰 산불 이후 산불 피해목을 제거후
현재 콩 등 농작물을 재배(1만여평)하고 있는데,
농장주는
이재두(귀농인)씨로 앞으로 이곳에 호두를 심을
계획이다.
산 중턱 곳곳에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주변과 어우러진 풍경이 흡사 목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못골 옆 주택 뒤편에 아주 멋진 소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수령 200여년이 넘는 노송으로 경주 이씨가 심었다고 하며
'미인송'이라고 부르는데,
이 나무는 여인의 가녀린
허리처럼 굽은 줄기와 긴머리처럼 축 늘어진 가지가 영락없는 미인을 닮았다고 하여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 못골에는 귀농인
2가구 포함 6가구가 살고 있다.
물방앗간 동네는 생나실 동쪽 건너에 있는 마을로 물방앗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어진 자연부락이다.
서원(書院)마는 솥뚜껑이산(鼎蓋山)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없어진 정산서원(鼎山書院)이 있었다.
7개의 산재 부락으로 구성된 생천리는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1리(생내실,
나붓들,
솥골),
2리(못골,
양갓,
천내)로 나눠 부르기도 한다.
한천을 경계로 두 마을로
분리된 생천리는 같은 마을을 가고자 할 경우에도 하천의 교량이 없어 백전리,
우계리 방향 우회도로를
많이 돌아가야 하는 큰 번거로움이 있다.
때문에 생천리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생천리
경로당,
솟골 경로당이 각각
있으며,
주민간에 소통이 어렵고
이장이 마을일을 보거나 전체 마을 행사시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다.
마을 주민들은 점점
단절되어 가는 두 마을을 이어주는 교량이나 잠수교 설치를 바라고 있다.
1999년 1월 25일 이장에 임명된 임 이장은 고향이 영천시
화산면으로 10세때 가족을 따라 생천리로 이사를
왔다.
과수(사과)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임 이장은 주민선거로 선출된
이후 지금까지 무투표로 17년째 주민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며 마을 일을
보고 있다.
재임
기간 |
성
명 |
~
1990.08.13 |
김정한(金貞漢) |
1980.08.14.
~ 1995.10.17 |
박시우(朴時雨) |
1995.10.17.
~ 1999.01.25 |
김태웅(金泰雄) |
1999.01.25
~ 현재까지 |
임장오(林長五) |
[참고자료]생천리 역대 이장 연혁(沿革)
임 이장은 이장으로 재임 하면서 여러 가지 공적이
있지만 가장 큰 업적은 생천리 경로당(2004.2.10),
솟골
경로당(2009.3.11)
건립을 꼽고
있다.
그당시 예천군에서는 각
마을마다 경로당 건립붐이 일어났는데 한정된 예산으로 경로당을 짓자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임 이장은 전 김수남 예천군수를 몇 번이고 찾아가
면담을 통해 경로당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나붓들 산림계 출연금 2천만원에 십시일반 모금한 주민 성금을 더해
연차적으로 두 곳의 경로당을 건립하여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하게 됐다.
생천리는 새마을 지도자(오상달,
68),
부녀회장(임순교,
64),
영농회장(신영한,
66),
생천리
노인회장(황재현,
80),
속골
노인회장(권재운,
84)
등 마을운영위원들간의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큰 불협화음 없이 마을의 모든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녀회(회장 임순교)를 중심으로 매년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토와 농로에
무분별하게 방치돼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농촌경관을 해치는 폐비닐과 농약빈병 등을 수거하는 "깨끗한 들판 가꾸기" 환경정화 활동을 실시하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마을 행사,
불우이웃돕기 등의 활동에
사용되고 있다.
또 경로당에 어르신 건강
노래교실,
운동교실 등을 유치하며
전주민이 화합으로 활력이 넘치는 마을로 소득증대와 지역발전에 적극 참여하는 등 모범 마을로 널리 알려지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마을 공사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마을 회관은 1980년 사업비 753만 원으로 55평을 건립했으나 철거하고 2004년 2월 10일에 생천리 경로당을
신축했다.
회관마을
진입로 포장공사는
1990년 사업비 392만 원에 폭3m,
연장
115m로 포장했다. 생천리 도수로 공사는 1982년에 사업비 410만 원에 연장 150m로 완공했다.
광역 상수도는 2014년에 연결 되었으며 농업용수는 생천
양수장(나붓들,
금곡천),
생내실
양수장(생내실,
한천)을 통해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하고
있다.
생천리 출향인 주요 인물로는 해양수산부 정보화
담당관 과장(서기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권오정(57)씨를 꼽았다.
권씨는 경로당에 대형
TV를 비롯한 물품을 기증한 것은 물론 매년 마을
어르신들 경로잔치 등 각종 행사시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어 마을 주민들로부터 자랑스런 출향인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권씨는 생내실
권영창(작고)씨의 자제로 현재 세종시에 거주하고
있다.
생천리에 흩어져 있는 자연 문화재를 살펴보면
용화사(龍和寺
대한불교
대승종,
생천리
398-4)는 1950년에 건축되었고 서울 중구 청구동 소재
흥도사(興道寺)를 본사(本寺)로 하며,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
2동,
미륵불,
7층 석탑이 들어서
있다.
2007년 5대 주지로 부임한 혜암 스님은
용화사(龍和寺)
창건 관련 설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 용화사 건너편 백마산
배꼽혈에 해당하는 곳에 영험한 약수터가 있다.
이 물을 마시면 배알이가
없어지고 피부병에 좋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약수터로 일시에 몰리면서 큰길까지 줄을 서게 되자 급기야 번호대기표를 만들어
약수물 깃는 사람들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약수터 옆에 산신각을 짓고 강 건너편에 용화사를 창건하게 됐다고 한다.
이 약수터는 가뭄을 안타며
청태(靑苔)가 끼지 않으나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고 부정 탄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오면 샘물이 흙탕물로 변한다고 전해지고 있어 신비의 약수임을 입증이라도 하고 있다.
약수터 가는 길은 금곡천을
건너야 하는데 큰비가 오면 돌다리가 유실되고 산 중턱까지 풀베기,
계단,
주변 정비 등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물을 깃는 사람들은 많이 불편하다며 이렇게 좋은 약수터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또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이르길 물속에 있는
나를 꺼내어 달라고 하여 금곡천에 가보니 부처님이 모래속에 반쯤 묻힌체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후 부처님을 절에 모시고
환자들이 용화사에서 요양을 하면 많이 고쳐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용화사(龍和寺)
현재
신도는 100여명이다.
(주지
010-3813-9605)
예천사(醴泉寺
대한불교 삼보조계종 생천리
495)는 1973년경 법화종으로 창건했으나 2016년 1월 17일 법우스님이 2대 주지로 부임하면서
개종했다.
법우스님은 경남 창녕
대운사에서 왔으며 예천사(醴泉寺)는 원래 용문사의 암자로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
되었고,
통일신라시대 석불을 지금의
예천사로 옮겨 모시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극락보전),
삼성각,
공덕당,
7층석탑,
요사채
1동이 들어서 있고 예천사(醴泉寺)
신도는
200여명이다.
(주지
010-6222-0396
/ 654-4745)
석관묘는 생천리 군부대 도로 우측에 솥골 마을
안쪽 산기슭에 있는데 옛날 太씨들이 살았다고 한다.
성황당 나무는
달우리고개(鷄鳴峴)에 있는 나무로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이 나무에
돌을 던지고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달우리고개(鷄鳴峴)는 생천 1,
2리 경계로 현 용산교
가기전 고개지점이며 옛날에는 이 고개가 높고 가파르며 무척 험해 용문장을 보러가는 장꾼들이 이 고개를 넘다 수레가 넘어지는 등 많은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고개를 낮추고
확포장을 하는 과정에서 성황당 나무가 베어졌고 이 나무로 인해 다친 인부들이 많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또 나붓들에 있는 느티나무에도 정월대보름 동신제를
지냈으나 2010년 박의씨가 돌아가신 후 부터는 안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읍나무로 지정된 수령 300년이 넘는 동신목 소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고사하고 없다는 기록이 있다.
정산서원터(鼎山書院터)는 서원마 뒤에 있는 서원으로
1612년에 서원을 세워서 이황(李滉),
조목(趙穆)을 배향(配享)하였는데,
1677년에 정산의 이름을
따서 정산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868년에 헐리었다.
생천리는 유명한 와송농장이
있다.
육녀봉(六女峰)
산자락 아래에 있는 와송
농장은 2009년 귀농한 이승환씨로 한때 조수입이
2억원이 넘는 부농이라는 언론보도가 나간 후 재배
농가가 급격히 늘어나 와송가격 하락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이씨는 재배를 포기하고 내년부터 초당옥수수로 재배작물을 변경할 계획이라고
했다.
주 품종은
예천준시(육녀봉준시곶감),
비가림 기와
와송,
예천 초당
옥수수,
속청 서리태 등이
있다.
농장 홈페이지(http://노래하는 나뭇가지.com/)
문의
010-7532-3370
예천농촌지도자회에 소속되어 농촌봉사활동을 펼치고
2003년 군정유공(군수)표창을 받은 임 이장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옳다고 여기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고야 마는 곧은 성품인지라 처음에는 무뚝뚝하게 보일지 몰라도 지내고 보면 남을 배려하며 옳은 일은 어떠한
상황에도 실천하는 경상도 사나이 기질을 타고 났다고 본다.
임 이장은 생천리가 다른 마을보다 전설과 문화재가
많은 것에 자부심은 느끼며,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산재해 있는 전설을 스토리텔링화 하는 등 특색 있는 마을로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앞으로의 희망 사항이라고
말했다.
생천리 마을을 취재 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사라진 자연 문화유산이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잊혀져가는 우리의
문화자원을 소중히 하고 후세에 널리 알리는 것은 현세대의 몫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차원에서 주민들과
함께 하는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이 성과를
거두어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고 젊은 인구가 들어오는
활력 넘치는 건강한 마을이 되길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