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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상상의 새 봉황(鳳凰)이 사는 상서로운 땅 예천, 봉덕산(鳳德山)

청솔댁 2018. 12. 4. 15:22
[문화유산 답사기]상상의 새 봉황(鳳凰)이 사는 상서로운 땅 예천, 봉덕산(鳳德山)



봉황(鳳凰)이 마시는 물 예천(醴泉), 상서로운 고장,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형의 땅이 예천이다. 상상의 동물 봉황의 흔적을 쫓아서 두 번째로 봉덕산(鳳德山 373m)을 찾아가 본다.

 

 

봉황형국의 진산(鎭山) 봉덕산(鳳德山)

봉덕산(鳳德山 373m)은 예천의 진산(鎭山, 주산 主山)이다. 소백산과 도솔봉을 지나온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곁가지를 일으키는 백두매봉백마단맥 구간에 솟은 산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봉덕산이 병풍처럼 예천읍을 둘러치며 높이 솟구쳐 있다. 봉덕산은 차가운 북서풍과 외부의 적을 막아주는 방어벽을 하고 있어 풍수적으로 보면 길지에 속한다고 하겠다.

 

 

봉덕산(鳳德山)은 애초에 덕봉산으로 불리웠다.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덕봉산(德逢山)으로 맨 처음 등장한 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 만날 자를 빼고 봉황새 이 들어간 덕봉산(德鳳山)이란 이름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여지도서>에 이르길 봉황새의 덕이 빛남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덕봉산(德鳳山)이라 한다고 기술했다. 옛 선인들은 덕봉산의 모양이 봉황이 나래를 펴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진산(鎭山)으로 삼고 상서로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덕봉산(德鳳山)은 봉황의 덕이라는 이름으로 왕세자를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귀인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이름이다.

 

 

수령은 고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덕봉산(德鳳山)에서 제사를 지내고 봉황의 덕을 칭송하면서 군민의 안녕과 무사태평을 빌었으며, 가뭄이 심하면 덕봉산 아래 장군바위(將軍巖)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였다.

 

 

또한, 봉란고개(鳳卵阜)가 노하리 32번지 근처에 있었던 작은 언덕이었는데 예천읍 진산인 덕봉산(德鳳山)이 봉황새가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하여 산 아래 작은 언덕을 봉황새 알처럼 둥글게 꾸미고 봉란언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예천읍을 공격하기 위하여 유천 화지와 용문 유전에 집결하자 예천보수집강소측에서 저들을 막아 달라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다. 봉란언덕은 한천 둔치를 매립하는 과정에서 없어졌으며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근처에 해당된다.

 

 

여기에서 일제 강점기 지명관련 오기된 부분을 살펴보자. 세종7(1425)에 왕명으로 팔도의 지리지를 편찬할 때 경상도 관찰사 하연(河演)이 펴낸 <경상도지리지> 예천군조에 대심리 서암산(西庵山)이 등장한다.

 

 

덕봉산(德鳳山)은 원래 노상리 뒤 흑응산(黑鷹山) 자리에 있었던 산으로 그당시 덕봉산에는 흑응산성이 있었다. 1914년 일제가 군사용 토지조사를 하면서 대심리 서암산(西庵山) 자리에 덕봉산(德鳳山)을 옮겨놓았으며 덕봉산 자리에는 흑응산성의 이름을 따서 흑응산(黑鷹山 217m)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이후 덕봉산(德鳳山)1918<조선5만분의 1지형도>에 봉덕산으로 등재하게 되면서 광복이후 지금까지 일제기록인 서암산(西庵山) 자리를 봉덕산(鳳德山)으로 써오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지명의 바로잡기는 일제문화 청산차원에서 언제가는 바로잡아야 할 일이나 이미 고착화된 봉덕산(鳳德山), 흑응산(黑鷹山) 이름을 원래되로 바로잡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비록 산위치 지명이 잘못 기재되었다고 하나 봉덕산(鳳德山)은 학가산(鶴駕山)과 마주보며 서로 짝을 이루어 상서로운 기운을 복돋우어 주고 있으며, 예천의 태평성대를 바래는 지역민들의 염원을 담은 산이라고 할 수 있다.

 

 

봉덕산(鳳德山) 정상에서 학가산을 바라보면 마치 학이 날아가는 형상과도 같다. 예천군 보문면, 안동시 북후면, 서후면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학가산(鶴駕山 882m)은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다르나 예천 봉덕산에서 바라볼때가 가장 아름답고 한 마리의 학()이 큰 날개짓을 하는 형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란 동물은 두루미과에 속하는 대형 조류이며, 학은 예로부터 우리의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친숙한 동물이다. 조상들은 곧게 서 있는 학의 모습을 통해 선비의 고고한 기상을 읽어 내었고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장수의 상징이기도 한 학()과 봉황(鳳凰)이 머무는 봉덕산(鳳德山)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은 보통 예사로운 것이 아니며 풍수적으로 봉덕산은 길지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를 증명하듯 봉덕산 중턱에 천년고찰 서악사(西岳寺)가 자리 잡았고 정상부에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 대감묘가 자리 잡고 있다.

 

 

일제에 의해 산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나, 신라 경덕왕 16(757)수주군 이래 조선시대를 지나 1,000여년의 세월동안 동헌(東軒)의 자리였던 노상리 예천군청사는 어쨌던 1914년 봉덕산이 옮기고 나서 실로 100여년만인 2018312일 예천읍 대심리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신청사 개청식을 가졌다.

 

 

예천군 신청사는 봉덕산(鳳德山)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있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옛날부터 한천을 중심으로 좁은 물가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넓은 천하의 중심인 예천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조선시대 예천 읍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방에 4읍내면(東邑內面, 西邑內面, 南邑內面, 北邑內面), 1중에 (군아)를 배치했다.

 

 

고을 군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방면으로 나누고 이름 붙인 것은 전국에서 예천이 유일했다고 하니 이는 읍치가 우주 곧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다. 또한 예천 오악(五岳)에 불사(佛寺)를 창건했다. 오악(五岳)(냉정산 동악사), 西(서암산 서악사), (남산 개심사), (용문산 용문사), (덕봉산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이다.

 

 

현세(現世)의 예천인들은 예천을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선인들의 뜻에 따라 신청사 시대를 맞아 봉황형국 봉덕산(鳳德山)의 상서로운 하늘 기운을 받아 예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도약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서암산(西庵山) 봉수대

봉덕산에서 서암산(西庵山 344m)은 유천 손기리 방향 능선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거리(0.3km)에 있다. 서암산 정상부는 묘지 1기가 차지하고 있으며 묘지 가장자리에 서암산 봉수대표지석이 서있다.

 

 

서암산 봉수대(熢燧臺)는 감천 포리 봉수산(할미성) 봉수대, 용궁 비룡산 봉수대, 풍양 풍신리 소이산 봉수대, 유천 고림리 봉수산 봉수대, 지보면 대죽리 봉수재 봉수대와 함께 국경에서 일어나는 변란 또는 내란의 일을 신속히 중앙에 알리는 옛 비상경보통신 수단으로 이용됐다.

 

 

여기에서 서암산에 대해 알아보자. 서암산(西庵山)은 서악산, 서악사 뒷산, 서암산, 상재봉, 두리봉 등 여러 가지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인 1918 <조선5만분의 1지형도>에 봉덕산으로 등재하게 되면서 광복이후 지금까지 일제기록인 서암산(西庵山) 자리를 봉덕산(鳳德山)으로 써오고 있다. 그렇다면 봉수대(烽燧臺) 자리였던 서암산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봉수(봉화)대는 과학적으로 잘 갖추어진 조선시대 군사통신 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전달했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여기에서 의문점이 드는 것은 지금의 서암산(344m)은 봉덕산(373m)보다 낮다. 또한 서암산에서는 봉덕산에 막혀 동쪽을 정찰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렇다면 더 높은 봉우리를 놔두고 왜 낮은 곳에다 봉수대를 설치했을까? 둘다 같은 서암산은 아닐까? 봉수대가 봉덕산에 있지는 않았을까?

 

 

신라시대 예천읍치 오악중에 西에 서암산 서악사, 에 덕봉산 중악(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을 두었으니 서악사 뒷산은 서암산이 맞지 않을까 싶으나 이는 추후 고증을 통한 확인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고자료] 봉덕산 등산로 안내

대창중고 운동장~흑응산~산신당~봉덕산~봉수대~봉화산~임도~헬기장(초소)~손기리(10km 4시간 소요)

대창중고 운동장~흑응산~산신당~봉덕산~서악사~산신당~흑응산~대창중고 운동장 (원점회귀산행 2시간 소요)

용산리 백룡사~백마산~봉화산~봉덕산~흑응산~대창중고 운동장

(4시간 소요)

 

천년고찰 서악사(西岳寺)

서악사(西岳寺 예천읍 대심1160)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예천읍의 주산(主山)봉덕산(鳳德山) 중턱에 자리잡은 천년고찰이다.

 

 

창건은 1960년 요사채를 중수할 때 발견된 3통의 상량문에 의하면 강희(康熙) 40년 신사(1701 조선 숙종 27)에 창건 되었다고한다. 건융(乾隆) 2년 정사(丁巳)(1737 영조 13)에 옮겨 지은 바 있으며, 건융 26년 신사(1761)에 상량, 동치(同治) 9년 신미(辛未)(1871)에 다시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악사(西岳寺) 창건 연대와 관련 두가지 밝혀지지 않은 설이 전해져 온다. 서악사(西岳寺)는 지금의 대심2리 천주교 묘지 뒤 골()에 있었는데 빈대 때문에 절이 폐사되고 지금의 장소로 옮겨 지었다는 속설(俗說)이 있다. 또 하나는 창건연대가 강희(康熙) 40년 신사(1701 조선 숙종 27)이 아니라 신라 신문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창건 관련 이 같은 설은 폐사 직전의 서악사를 지금의 규모로 크게 중창(重創)한 성태(成太)스님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다. 애초 창건연대를 증명하는 탱화 3점이 반출되어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이를 증명하는 길이 어렵다고 하나 서악사에 20여년간(1987~2004) 계시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重創)하며 창건 관련 유래를 밝히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나름 확신을 갖고 있지만 기록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성태(成太)스님은 서악사가 대심2리에서 옮겨 지은 것이 아니며, 옛날 서악사 자리에는 작은 암자(西庵)가 있었고 봉덕산 정상부 토굴에서 스님이 수행했다고 한다. 서악사는 1987년 중수(重修)할 당시 법당인 원통전과 요사채 2동만 있는 암자 규모의 작은 절이었고 거의 폐사 직전의 건물이었다.

 

 

이에 1987년 주지로 부임한 성태스님이 직접 중장비를 운전하며 바위를 깨고 오솔길은 큰길로 확장하고, 골짜기는 철근콘크리트 옹벽으로 쌓으며, 대웅전(1989), 설법전(1991), 응향전(요사채 1992), 범종각(1992), 산신각(1992), 낡은 법당(원통전)을 허물고 종무소(1994)를 지었으며,

 

 

룸비니유치원과 천불전(1996), 나한전(2003)을 새롭게 중창해 비로소 지금의 사찰다운 큰 규모로 갖춰지게 됐다. 산신각은 기울어져 붕괴우려가 있는 것을 2009년 부임한 세관스님이 2016년 새로 지었다.

 

 

초창기 법당인 원통전 관련 문헌 내용은 현재 법당이 없어졌기에 기록에서 삭제코자 한다. 다만 원통전에 모셔져 있던 6축의 탱화 중 현재 석가모니후불탱화(이조말엽) 하나만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외부로 밀반출 된 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대웅전은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입상, 자장보살입상이 나한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 사보(寺寶)1933년에 주조(鑄造)된 동종이 대웅전에 있는데 조선 후기 양식을 잘 나타내는 작품이다.

 

 

현재 서악사 범종(梵鍾)은 주지 권성태(權成太)스님의 원력(願力)과 총무 김묘성(金妙性)씨를 비롯한 불자들의 성원(聲援)으로 불기2538(1994) 양력 77일 불사(佛事)했다. 종각에는 범종(梵鍾),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 등 사물(四物)이 있다.

 

 

서악사로 올라가는 진입로 우측에는 서악사 사적비가 2003년 세워졌으며, 서악사 주변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그물망을 치듯 촘촘히 솟아 있어 애초에 암반을 깨고 서악사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천 봉덕산~백마산 전투

봉덕산, 백마산 일원은 6.25 전쟁때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인 격전지로 지금까지도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봉덕산 등산로 옆에 있는 6.25 격전지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표시하고 있다.

 

 

이곳은 6.25 전쟁 당시 1950714일부터 716일까지 전개된 봉덕산~백마산지구 전투에서 군과 경찰로 혼합 편성된 국군 8사단 21연대 예하 혼성대대와 북한군8사단 예하 규모 미상의 적이 대치하여 격전 끝에 북한군으로부터 우리 고장 예천을 지켜냈던 호국 용사들의 이 깃든 장소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당시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킬 수 있었으며 또한,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전선 구축을 위한 시간확보에 기여하며 장차 6.25전쟁의 전세 역전을 위한 국군이 북진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 할 수 있었던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自由, 平和, 護國의 일념으로 우리고장 예천을 지켜내신 호국 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그 정신을 받들어 후대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소중함과 나라사랑 정신을 우리 모두가 고취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알림판을 세웁니다.’ 2016. 2. 16.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 대감

봉덕산 정상부 아래에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 18531938) 대감 묘가 있다. 우리나라 근대 우정의 선구자로서 고종퇴위 후 은둔한 장화식(張華植) 대감은 호명면 원곡리 안질에서 태어나 예천읍 노하리(路下里)로 옮겨 살았다. 초명은 낙구(洛龜), 자는 병숙(丙淑), 호는 연파(蓮坡) 또는 학암(鶴岩), 국파(菊坡), 본관은 인동, 연복군 말손(延福君末孫)의 후손, 영제(永濟)의 장자, 근대 우정(郵政)의 선구자이다.

 

 

7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른과 다름없이 복상(服喪)을 하였기로 이웃 사람들이 "하늘이 낳은 효자(孝子)"라고 칭찬(稱讚)했고, 11세에 <통사(通史)>를 읽다가 관우(關羽)가 여몽(呂蒙)의 꾀임에 빠지는 대목에서 여몽이란 두 글자를 성을 내며 지워버렸으니 그의 정의감은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이 천품으로 굳어졌다.

 

 

1877(고종 14)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사로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1887)에 오른 후 외아문 주사(外衙門主事), 봉화 현감(奉化縣監, 1892), 영덕 현령(盈德縣令, 1893)을 거쳐 군부 경리국 제2과장(軍部經理局第2課長, 1895)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는데, 을미사변(1895)으로 민비(閔妃)가 일본에 의해 시해(弑害)되자, "역적(逆賊)을 치고 원수를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라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하리면 은산리 양전(良田)마을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를 각별히 아끼던 고종의 명령으로 다시 군부 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 1897)에 오르고, 1902(광무 6) 924일에 지금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정2품 한성부 판윤(判尹)에 올랐는데, 때마침 서울에서 일본 제일은행권 화폐(第一銀行券貨幣)가 유통되고 있어 이를 금지하였으나 일본의 강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1903.2)하였다.

 

 

다시 육군 참장(陸軍參將, 1904)을 거쳐 우리나라 통신 관청(通信官廳)의 총책임인 통신원 총판(通信院總辦, 1906)이 되었다. 19064월에 통신원(通信院)이 일본인에게 넘어갈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관원들과 함께 총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려 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군부 참모국장(軍部參謀局長)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굳이 사양하였다.

 

 

이 때 왕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도, "시골로 가지 말고 나의 가까이에 있어 다오."라고 하므로, 서울에서 머물다가 고종이 퇴위(1907)한 뒤 예천으로 귀향(1908)하여 일체 외부와 인연을 끊고 여생을 보냈다. 당시 벼슬길에 있던 아들 3형제도 모두 귀향하였다.

 

 

그는 학암정사(鶴岩精舍, 1915)를 짓고 경전(經典)을 읽으며 자손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타계하였다. 장례 때에는 예천읍 대심리 서악사(西岳寺) 뒷산인 봉덕산 유좌(鳳德山 酉坐)에 있는 묘지에 수 만명의 조객(弔客)이 운집했다. 장대감묘(張大監墓)는 학가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안장 됐다.

 

연파독역산(蓮波讀易山)

서악사(西岳寺) 범종각 사천왕상 입구에 있는 연파독역산(蓮波讀易山)이라 음각된 암석은 봉덕산 정상부에 안장된 한성판윤(漢城判尹) 연파(蓮波) 장화식(張華植, 仁同)이 역경(易經)을 강독(講讀)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표지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글은 호명 원곡출신 연파 장화식(張華植 1853-1938)한성판윤이 20세 되던 해 가장 어려운 주역(周易)을 다 읽고 나서 그 기쁜 마음을 돌에다 새겨 이 바위에 붙였다. 1905년 통신원 총판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을 온몸으로 막다가 물러나 1908년 낙향하여 이듬해 서악사를 찾아서 옛날 공부하던 때를 회고하면서 이글을 지었다. 글씨는 손자 기생(基生)연파 장화식이 이 절에서 주역을 읽었다라고 썼다.

 

 

기생바우 전설

서악사에서 뒤로 올라가면 크고 넓은 바위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기생들이 날마다 술을 먹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원인 모르게 기생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리 사람들은 이 바위 이름을 기생바위라고 하고 그 골짜기를 기생밭골이라고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에 앉으면 죽는다고 하여 그 위에 앉지를 않았다고 한다.

 

 

또 사또가 부임하는 날 길거리는 온통 술주정뱅이들의 세상이었다. 관아에서는 전임 사또, 신임 사또가 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 신임 사또는 흥에 겨워 이곳 기생바위로 장소를 옮겨 밤새도록 즐겼다. 그러다가 기생들이 술에 취하여 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어느날 예천에 침략자들이 들이 닥쳐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 때 예천에 살던 어느 기생이 적장을 유인하여 이 기생바위로 기서 술을 먹다가 적장을 바위 밑으로 밀어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한다.

 

 

현재 서악사 주변 숲가꾸기를 하면서 드러난 산속은 온통 바위덩어리로 기생 바위 전설이 사실이라면 산신각 좌측 뒤편으로 30여미터 오르면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정상부가 평탄해 기생 바위라고 짐작해 본다.

 

 

대심리 고분군

고분군(古墳群)은 대심리 큰하무실 뒤(스카이뷰 아파트 뒤) 봉덕산 정상 등산로를 따라 석정리로 이어지는 주변에 삼국시대 고분이 널리 분포 되어 있다. 현재 고분군은 거의 도굴되고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형체를 잘 알 수 없으나, 능선을 따라 숲속을 헤치고 들어가면 방치된 고인돌 고분 몇 기를 볼 수 있다.

 

 

고분군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표시하고 있다. ‘이 일대는 1,5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옛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대심리 고분군 지역입니다. 이 고분군은 예천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으로서 군민 모두가 보존하여야 할 자산입니다. 현재 경작지 외에 무단으로 토지의 형질을 변경하거나 훼손·도굴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2009. 6 예천군수

 

 

고분군 안내판은 예천군에서 20096월에 설치했으며, 고분군 중 완전한 봉분이 있는 것도 있을 정도인데 이 후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복구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체 방치되고 있어 안내판 주변에 어떤 고인돌 고분이 있는지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참고로 안내판 뒤편에 있는 것은 고분군이 아니고 예비군 참호이다. 등산객들이 이를 잘 모르고 착각하는 일들이 종종 있기에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예천읍의 수호신 장군바위(將軍巖)

예천읍 서본리 예천초등학교 뒷산 흑응산(黑鷹山) 중턱에 넓이 10여 미터, 높이 46미터의 크고 넓은 바위를 일컬어 장군바위(將軍巖)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읍민(邑民)들은 이 장군바위가 매우 영검이 있다고 하여 예천읍(醴泉邑)의 수호신(守護神)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금기(禁忌)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관민(官民)의 대표가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생돼지 머리를 위시하여 모든 제물(祭物)을 날것으로 장만하여 옛날 관복(官服)차림으로 정성들여 제사(祭祀)를 이 장군바위 앞에서 올리고 시장을 예천읍 앞에 있는 한천(漢川) 강바닥에서 보게 한다.

 

 

그리고는 시가지 요소엔 황토(黃土)를 뿌리고 여염집과 각 상점마다의 지붕과 출입문에 버드나무의 푸른 가지를 비스듬이 꽂아두면 사흘 안으로 반드시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장군바위 밑에 묘()를 쓰면 날씨가 가물고 읍내에 있는 개들이 몹시 짖어댄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장군바위 앞엔 일체 묘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수 백년 동안 예천읍민들의 불문률(不文律)처럼 되어 있다.

 

 

때로는 욕심 많고 세력(勢力) 있는 사람들이 명당(明堂)이라는 장군바위 밑에 묘를 몰래 쓰고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평지처럼 그 위에 띠를 입혀 놓아도 개들이 짖어대고 비가 내리지 않게 되어 읍민들에게 발각되어서 묘를 파헤쳐 버리기 때문에 묘를 못쓰게 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예천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서 승리를 맹서(盟誓)하였으며, 1894년 동학 농민운동(東學 農民運動) 때 예천군수가 여기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봉덕산 소개에서 흑응산에 있는 장군바위(將軍巖)를 밝히는 것은 애초에 덕봉산이 이곳에 있었으며 주민들이 예천의 수호신으로 여겨왔던 신불(神佛)이었기에 언급해 본다.

 

 

현재 장군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울창한 숲에 가려져 그 위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흑응산(黑鷹山) 아래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구전으로 전하여 오는 자료를 종합하여 흑응산 주변을 탐문한 결과 그 위치는 대략 예천경찰서에서 바라보는 직선 거리 흑응산 중턱으로 서본리 대성사(서본리 9-11)에서 올라가는 옛길이 있었으나 경사가 급하고 희미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

 

 

흑응산 등산로에서 장군바위(將軍巖)를 찾고자 흑응산성을 따라 탐방한 결과 '흑응산 유아숲 체험원' 아래 흑응산성을 따라가니 큰 바위가 나타났다. 읍지에 나오는 '산 중턱에 넓이 10m, 높이 4~6m의 넓은 바위를 일컬어 장군바위라고 한다'와 비슷한 크기의 암반이다.

 

 

더 자세히 알고자 하였으나 주변은 참나무 낙엽이 발목 이상으로 쌓이고 미끄러우며 토성 아래는 깊은 골짜기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기에 바위 아래로 접근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여 돌아서야 했다. 이후 예천문화원에 확인한바 이곳이 장군바위(將軍巖)임이 확인 되었다.

 

 

장군바위를 따라 흑응산성(黑鷹山城)이 있는데 이 산성은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아직도 옛산성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돌들이 남아 있다. 흑응산성은 19858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흑응산 정상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은 덕봉산성(德鳳山城) 또는 봉덕산성(鳳德山城)으로도 불린다. 여기에서 덕봉, 봉덕 지명이 나오는 것은 봉덕산이 원래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둘레는 1,900m, 높이 34m이며, 내성 안에 우물 2개와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하며, 군수품을 저장하던 창고로 보여지는 자리에는 느티나무 수백그루가 하늘을 가린체 자라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흑응산 정상에는 성황당(백마사)이 있다. 또한 영주국유림관리소에서 20172월에 개원한 '흑응산 참참참 유아숲체험원'이 있다. 주요시설로 통나무 모임터, 모래놀이터, 나무기어오르기, 산책로, 나뭇잎식탁, 대피소, 간이화장실 등이 있다.

 

전설로 내려오는 영험한 바위로 알려진 '장군바위'와 주변 흑응산성을 복원하여 소중한 문화재로 보존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봉황(鳳凰)과 관련이 있는 지명조사 두 번째로 봉덕산(鳳德山) 취재를위해 수차례 오르내리면서 예천의 산세를 비교하다보면 참 재미가 있고 절묘하리만치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 것에 놀라곤 한다.

 

예천과 안동이 공동으로 유치한 경북신도청, 이제 학()과 봉황(鳳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서로운 예천고을이 오랜 천년의 잠에서 깨어나 비상(飛上)을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천강감로 지출예천(天降甘露 地出醴泉), 하늘에서는 단 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단 샘물이 나온다는 (단술예)(샘천), 봉황이 마시는 샘물이 솟는 신비로운 땅 축복의 고장 예천의 새로운 비상(飛上)을 꿈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예천읍행정복지센터 장광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