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鳳凰)은 동아시아의 신화
및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다.
용과 학이 교미하여
낳은 상서로운 새로 어질고 현명한 성인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는 새(鳥)이다.
근자(近者)에 들어 봉황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전설속의 새로만
치부하고 그냥 넘겼던 봉황(鳳凰),
내가 매일 새벽
오르는 봉덕산(鳳德山
373m)도
봉황(鳳)과 관련된 지명인
것을 보면 보통의 산이 아니건만 그동안 무심코 지나친 내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의 차원에서
봉황(鳳凰)의 흔적을 쫓아보기로
했다.
우선
봉황(鳳凰)이란 어떤 새인지
고대문헌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봉황의
생김새는 닭처럼 생겼지만 5색의 깃털 무늬를
지니고 울음소리는 5음을
내며,
오동나무에
깃들이고,
대나무의 열매를 먹고
산다는 상서로운 새이다.
머리의 무늬는
덕(德)을
나타내고,
날개의 무늬는
의(義)를,
가슴의 무늬는
인(仁)을,
배의 무늬는
신(信)을 뜻하고 있어
덕·의·예·인·신을 골고루 갖추고
있으므로 용,
기린,
현무와 함께
사령(四靈)이라
불리었다.
또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봉황의 머리 앞쪽은
기린의 수컷,
뒤쪽은
사슴,
몸은
뱀,
꽁지는 물고기와
같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 다른 이야기로는
여덟가지 짐승의 좋은 형상만을 갖추고 있다고 했는데 앞모습은 군신의 의를 지키는 기러기며,
뒷모습은 어진 성군을
상징하는 기린이다.
턱은 천심을 전달하는
제비를 닮았고,
부리는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불러내는 닭의 부리를 닮았다.
목은 풍년과 다신을
불러들이는 뱀의 목이고 꽁지는 물고기 꽁지인데 잘때도 눈을 뜨고 자며 언제나 무리지어 다닌다하여 병권(兵權)을
상징한다.
이마는 결백하고
장수하는 황새의 이마요,
등은 재앙을 막고
앞일을 예견하는 거북이의 등이다.
봉황은 합성어로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하는데,
암수가 한 쌍으로
만나면 금실이 매우 좋다고 한다.
성군(聖君)이 출현하거나 세상이
태평성대일 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360
종류의 새들의
수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새들의 군주와도 같은 상서로운 존재로 봉황이 하늘을 날면 많은 새들이 그 뒤를 따라 날으며,
봉황이 죽으면 많은
새들이 탄식하며 슬피 운다고 한다.
또한 봉황은 살아있는
벌레를 먹거나 해를 입히지 않고,
살아있는 풀 위에
앉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옛 부터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이라고 여겨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새를 중요시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봉황을
특히 ‘신조(神鳥)’라 하여 새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쳐서 신성시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봉황의
생김새와 행동거지가 임금이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여겨 임금의 상징으로 삼아 현 왕조 시대가 태평성대임을 강조하였으며,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 문헌에서
살펴보았듯이 봉황(鳳凰)이란 지명은 보통
예사로운 것이 아님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얼마전 다녀온 충북
청주시 소재 과거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된 청남대(靑南臺)
실내 전시관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란 안내글이 있어
유심히 읽어 보았다.
『대통령의 표장 봉황은
하늘의 이상을 실현하는 성천자(聖天子)를
상징한다.
무궁화 꽃은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국가 지도자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화합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봉황은 예로부터 새
가운데 으뜸으로 알려진 상상 속의 새이다.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암수컷이 사이좋게
오동나무에 살면서 예천(醴川:甘泉,
중국에서 나라가
태평할 때에 단물이 솟는다는 샘)을 마시고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고 전해진다.
(후략)』
이 글귀를 읽다 나의
시선을 한참동안 고정시킨 ‘예천(醴川:甘泉)’이란 글자에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야기를 본론에서
조금 벗어나 예천이란 고을 이름은 신라 경덕왕 17년(757년)에 수주군으로 처음
불리웠다.
여기에서
수주(水酒)란
'물(水)과
술(酒)의 합성어로 물맛이
아주 좋은 샘물'이란
뜻이다.
수주(水酒)와 밀접한
주천(酒泉)이 우리 지역에
있는데 주천(酒泉)은 군방골 샘으로
알려져 있으며 ‘물맛이 달고 차며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져
온다.
기록에 의하면
정유재란때 왜군을 치기위해 이것을 지나던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곳을 찾아 물맛을 본후 ‘과연 이름그대로
예천(醴泉
단술
샘)이로구나’
라고 감탄했다는
얘기가 있다.
『택리지』에서도
‘사람이 살만 한 곳은
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라고 했으니 맛이
단 샘물이 솟아나는 내고장 예천은 가히 최고의 고장이 아닌가 싶다.
단술이 솟아나는
샘이라고 널리 알려지며 예천(醴泉)지명의 어원이 된
샘물 ‘주천(酒泉)’은 예천읍 노하리
64-1
번지 뒤에
있다.
지금의
‘주천(酒泉)’은 일제가 개발한
우물이고,
원래의 주천은
대창고등학교 아래 노상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
상수도(上水道)가 보급됨에 따라
폐정(廢井)하였던 것을 이
우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愛情)과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얽힌 유서(由緖)
깊은 샘이기에
1990년에
목조와가(木造瓦家)
사각(四角)지붕의 보호각을
세우고 샘(酒泉)을
복원(復元)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
어쨌든 역사에
기록되어 전해져 오는 단맛의 샘물,
우리 조상들이 마시던
그 샘물을 지금 마실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겠다.
또한 원래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여 샘물을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본다.
복원 후 단샘 물맛을
맛보고자 전국에서 예천을 찾아올 그런 상상을 곁들여 해본다.
유교
5경중 하나인
예기(禮記)에는
천강감로지출예천(天降甘露
地出醴泉)이라 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는
땅에 백성을 위해 솟아나는 단샘”이라 기록
했다.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예천(醴川:甘泉)에서
감천(甘달감,
泉샘천)은
천향(泉샘천,
香향기향),
온수곡(溫水谷)
등 물과 관련된
지명이 있는 감천면(甘泉面)으로
금강산(金剛山)
온정리 온천수와
수질이 같은 중탄산-
나트륨(HCO3-Na)
예천온천(醴泉溫泉)이
있다.
수주군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예기≫에 나오는
지출예천(地出醴泉)에서 예천이라는
지명을 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수주(水酒)와
예천(醴泉),
감천(甘泉)은 모두 물맛 좋은
샘이 있다는 뜻으로 봉황이 마신다는 샘물이 있는 예천(醴泉)은 사람이 살기 좋은
이상향의 땅 상서로운 고장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청남대는 1일 관람객이
2천명이 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문득 방문객중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란 안내글에서
말하는 예천(醴川:甘泉)이 경북
예천(醴泉)이란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심코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예천이란 글자에서 조용하던 내 심장은 요동을 쳤다.
전국적으로 아직은
생소한 예천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예천이 왜 봉황이 사는 상서로운 고장인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봉황(鳳凰)의 흔적을 쫓아서 그
첫 번째로 천년고찰 소백산 명봉사(鳴鳳寺)를
찾았다.
◆
봉황이 크게 울었다는
명봉사(鳴鳳寺)=명봉사는 예천읍에서
23km로 약
30여분
소요된다.
단양방면 지방도
927호선을 타고 달리다
양수발전소 송월호(하부댐)
사곡교차로에서 좌측
지방도 901호선(석항명봉로)으로 접어들면 명봉사
일주문 앞에 도착 한다.
소백산의 단풍은
10월 말이 적기라고
하나 명봉사 입구는 11월 첫주임에도 단풍이
아직 고운 빛을 내고 있었다.
단풍 절정기에 오면
명봉사 계곡이 붉은 핏빛으로 물든다니 그 아름다움은 여기서 다 읊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가을의 끝자락임에도
이날 찾은 명봉사 입구의 단풍은 하늘을 뒤덮은 울창한 숲과 화려한 단풍들로 인해 가을을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면 이곳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곡을
따라 울긋불긋 단풍터널이 내원암까지 절경(絶景)을
이루었다.
명봉사(鳴鳳寺)까지 승용차로 갈수는
있지만 사색을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면 일주문 앞 버스 회차로 근처에 차를 주차한 후 단풍계곡을 따라 걸어서 가야 할 것이다.
일주문에서 명봉사
0.8km,
내원암
1.8km,
문종대왕 태실
1.0km,
사도세자 태실
1.4km
거리에
있다.
일주문에서 도보로
명봉사 주변을 둘러보고자 한다면 등산과 사찰 관람,
휴식등을 포함 약
4.5km
2시간 정도이면
충분하나,
명봉사 주변은 많은
문화재가 있고 숲이 울창하고 임상이 다양해 발길이 더디게 되기에 문화답사로 다녀오고자 한다면 3시간 정도 잡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여름철 하늘 한 점
볼 수 없던 초록으로 가득 덮인 명봉사 계곡에 단풍이 하나둘 떨어지면서 빈 하늘이 곳곳에 보였지만 인적 없는 산사의 숲길을 걷는 것은 무거운 내
마음을 다 내려놓고 잠시 쉬어가는(休)
힐링코스로 제격이
아닌가 싶다.
명봉사 일주문 앞에는
예천군 관광안내도와 제2소백산 지장보궁
성지(聖地),
태실비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0.1km
지점 좌측에
‘예천 명봉리 경모궁
태실 감염 각석문(醴泉
鳴鳳里 景慕宮 胎室 監役 刻石文)’
문화유적이 자연석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2012년
9월 명봉리 조선왕실
태실유적 발굴조사과정에서 발견된 '각석문'은 정조
9년(1785년)에 사도세자의
태실공사 책임자들의 명단이 자연암석에 가로 76cm,
세로
99cm의 크기에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고 있다.
각석문은 사도세자의
태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및 공사의 규모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조 재위기간 중 추진된 사도세자 추숭사업의 전모 또는 정조 연간의
정치·문화사를 해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2014년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623호로
지정됐다.
명봉사 초입에는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서 있는 엄청나게 큰 전나무 1본이
있는데,
이 나무는
2003년
12월
29일 보호수로
지정됐다.
해발
500미터에 위치한
명봉사는 주변 임상이 태초의 원시림같이 보존되어 있고 다양한 수종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어 광릉 수목원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명봉사,
내원암 일원에는 특히
단풍나무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늦은 가을철 호젓한 사색의 길로 아주 좋다.
비단 전나무
1본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들이 보호수로 지정되어도 될 정도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지천에 있어 휴식(休)과 힐링의 장소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예천군 효자면
명봉사길 62,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인
명봉사(鳴鳳寺)는
875년(헌강왕
1)용문사를 창건한
두천리 출신 두운(杜雲)선사(禪師)가
창건했으며,
1662년(현종
3)
화재로 전소된 뒤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중건했다.
1668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신익(信益)
등이 중창의 뜻을
세우고 10여 년 동안 시주를
얻어 크게 중창했다.
1807년(순조7)행선(幸善)이 중수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6·25전쟁 때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1955년 주지
만준(滿俊)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無量壽殿)과
종무소(宗務所),
삼성각(三聖閣),
약사전(藥師殿),
누각,
요사채,
5층석탑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인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鳴鳳寺境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인
명봉사문종대왕태실비(鳴鳳寺文宗大王胎室碑),
사도세자
태실비(思悼世子(莊祖)胎室碑)가
있다.
무량수전 옆에 둘이
한 자리에 세워져 있었던 문종대왕과 사도세자의 태실비는 2016년 명봉사 무량수전
뒷산 원래의 자리인 태봉 정상으로 옮겼으며 그 자리에는 터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석물들을 옮겨 놓았다.
명봉사에 봉안된
태실로 가는 길은 요사체 우측 안내판을 따라 오솔길을 오르면 된다.
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0.15km),
문종대왕태실(0.3km),
사도세자
태실(0.7km)이다.
경사가 좀 가파르긴
해도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명봉사와 잘 어우러진 주변 풍경과 문화재를 둘러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역사문화탐방이 되지 싶다.
◆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먼저 오랜 세월
버티고 서있는 아름드리 전나무 뒤에 경청선원 자적선사 능운탑비(境淸禪院
慈寂禪師 凌雲塔碑)가
나타난다.
자적선사능운탑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는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활동한 자적선사(882
~ 939)의 행적을 기록한
비이다.
고려 태조의 명으로
941년(태조
24)에
세워졌다.
자적선사의 속성은
김씨로 법명은 홍준이며 진한 명가의 후손이다.
939년
10월 구산사에서
입적하자 태조 왕건은 시호를 자적(慈寂),
탑의 이름을
능운(凌雲)이라 하도록
하였다.
비문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바람과 구름에 닳고 닳아 탁본을 하지 않고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비문의 내용은 고증에
의하면 도평성에서 홍준화상(자적선사)을 따르는 신도들이
우법사(右法師)에게 보낸
첩문(帖文)과 타비의 조성에
관한 것이다.
바로 이 첩문이
이두로 작성된 공문으로,
고려 초기의 공문서
양식과 당시의 이두 사용법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두문은 완전히 우리
말의 어순으로 쓰였고,
토도 신라시대보다
훨씬 길어져 국어의 표기가 섬세해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고려 초기의 불교사와 예술사 및 국어학 연구에 있어서 소중한 자료가 되어주고 있다.
◆
문종대왕
태실비=자적선사
비각을 지나 산
윗쪽으로 150여 미터쯤
올라가면,
주변보다 다소 높은
작은 봉우리에 문종대왕태실비(文宗大王胎室碑)가
보인다.
문종대왕
태실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는 영조
11년인
1735년에
세워졌다.
태실비는 일제가
태실을 발굴해 간 뒤
명봉사 대웅전 좌측으로 스님들이 옮겨다 놓았었는데,
예천군에서 문화재청과
협의 끝에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유물 발굴때 문종의
태는 작은 항아리에 담아 큰 항아리에 넣은 다음,
네모난 석함에 담아
팔각몸돌 아래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태봉 정상에 올라
명봉사 주변 산세를 훑어보면 풍수에 잘 모르는 사람도 이곳이 천하명당 자리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봉황이 하늘 높이
날며 이곳에 내려앉아 크게 울었다는 전설이 빈말이 아닐 정도로 산세가 좋았다.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
명봉사(鳴鳳寺)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영주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종이 봉(鳳
혹은
鶴)을 만들어 날렸더니
봉황은 높이 날아 부석사에서 200여리나 떨어져 있는
학가산(鶴駕山)에 내려앉아 알을
까니 이곳에 ‘영봉사(詠鳳寺
안동 북후면
석탑리)’를 지었다고
한다.
알을 깐 봉황이 오래
머물지 않고 새끼와 함께 더 넓고 안락한 곳을 찾기 위해 주변을 날다 금학산의 숲이 울창하고 주변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좋은 서식지를 찾게
되어 이곳에 봉황이 깃들었다 하여 ‘봉서사(鳳棲寺
안동 북후면
옹천리)’를
지었다.
또,
이곳
‘봉서사’에서도 봉황은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고,
산세가 맑고
부드러우며 온 산이 솔숲으로 울창하여 아늑하면서도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천등산 남쪽기슭에 머물게 되어 바로 이곳에
봉정사(鳳停寺
안동 서후면
태장리)라는 절이 또
탄생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이 봉황은
하늘높이 날아 소백산맥 깊고 고요한 골짜기에 있는 현재의 명봉사(鳴鳳寺)에서 크게 울어
명봉사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 명봉사는
100칸이나 되는 매우
큰절이었으나 아쉽게도 6·25로 말미암아
소실되었다고 한다.
문종대왕태실비에서
눈여겨 볼 곳이 하나 있다.
태실비 뒤에 있는
석물은 원형이 훼손되고 없어 새로 제작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형 석물
비면에 ‘예천 읍승격 서기
一九三七년
七월
一일’이라 음각되어
있다.
이 석물은 일제가
1932년 건립한
예천읍사무소에 예천읍 승격을 기념하고자 문종대왕태실비 중 일부와 돌거북이 기단을 가져와 비면을 깍고 읍승격 표시석을 세웠다.
그러나 이비는
명봉사내 조선 문종대왕 태실비의 기단(基壇)으로 밝혀져 문화재
정비계획에 의거 2016년
8월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이전의 표지석과 비슷한 읍승격비를 새로 제작하여 2016년
12월
설치했다.
이는 일제치하의
대표적인 문화훼손 사례가 아닌가 싶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 비면에 새겨진 ‘예천읍승격’
비문은 지웠으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
비운의
사도세자(경모궁)
태실비=사도세자
태실비(思悼世子(莊祖)胎室碑)비는 문종대왕
태실에서 0.4km
위쪽 능선에
있다.
태실을 복원하면서
등산로가 잘 정비되었지만 경모궁 태실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낙엽이 많이 쌓여 매우 미끄러웠다.
그러나 원시림 같은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쉬엄쉬엄 오르막을 오르면 금세 도착한다.
사도세자(경모궁)
태실이 봉안된 자리는
4면이 모두 경사진
산봉우리(621m)로 주변을 정비
잡목이 없어 탁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주변의 백두대간
소백산 줄기가 태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듯 울타리처럼 펼쳐지는 산세를 보고 있으면 천하명당 길지임을 풍수의 초보자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예로부터 소백산
자락에는 길지가 많기로 알려져 있기에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명봉산이 명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명봉산 태실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서 1735년(영조11년)년 정월에 태어나
불꽃 같은 삶을 살다 영면했다.
사도세자는 두 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열다섯이 되자 연로한 부왕을 대신하여 13년 동안이나 왕좌를
지키지만 하늘은 그에게 제왕적 역량을 다 펼쳐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28세의 꽃다운 인생을
마친 슬픈 이야기의 왕세자가 되고 만 것이다.
사도세자는 영민하게
태어나고 태 또한 명당에 모셔졌건만 어쩌다 비운의 삶을 마감했는지 너무나 안타깝다.
1930년 문화적 수난기에
일제는 우리나라 전역의 태실을 발굴하고 태가 든 태 항아리를 서삼릉(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옮겨 통합
관리하게 되었다.
경모궁 태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에 내버려진 태실비는 1940년 태실 남쪽
200여 미터 아래에
위치한 명봉사로 옮겨진 후 명봉사 주지가 비면을 깍아 ‘소백산 명봉사
사적비명(小白山
鳴鳳寺 事蹟碑銘)’이라 새겨 사적비로
둔갑 되었다.
복원된 경모궁 태실비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여 보았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게 느껴졌다.
고요하던 봉우리에
바람이 잠시 일더니 하늘에서 단풍잎 하나 머리위로 ‘툭’하고
내려앉았다.
사도세자가 무엇을
전하려 하는 것일까?
구천을 헤메였던
비운의 사도세자 태실이 늦게나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봉우리를 내려오는
계단위로 붉은 물감이 흘러내리듯 만산홍엽이 물결치며 떨어지고 있었다.
◆
국내3대지장보궁
제2소백산 지장성지
내원암(內院庵)=예천군 효자면
명봉사길 139,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명봉사의
부속암자인 내원암은 고려태조 5년(922년)에 도선국사가
창건(創建)했으며,
명봉사 입구에서
좌측(左側)으로
0.6km
지점 해발
600m에
있다.
국내지장
3대보궁중
제2의
지장보궁(地藏寶宮)인 내원암은 명봉사와
함께 6·25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1988년에 명봉사 주지
성면(性面)스님이
중건했다.
기록에 의하면
내원암은 도선국사가 미래세(未來世)의
현세고뇌중생(現世苦惱衆生)들을 위해
참회(懺悔)와
복전(福田)의
길지(吉地)로 여기시고
당대(當代)의
9승지(九勝地)로
꼽고,
원각산(圓覺山)
비연봉(飛燕峰)
아래에
현세(現世)의 부처님이신
지장보살진신(地藏菩薩眞身)이
상주현신(常住現身)하는
기도도량(祈禱道場)인
내원암(內院庵)을
천상(天上)의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을
비유(比喩)하여
내원암지장보궁(內院庵地藏寶宮)으로
명칭(名稱)하여
대명(代名)하여 왔다고
전해진다.
1687년 조선 숙종
13년에
금계(錦溪)스님이
중수(重修)했고,
1862년 조선 철종
13년에
덕산(德山)스님이
보수(補修)하였으나,
1950년
6,
25 동란(動亂)
때
법당(法堂)
1동(棟)을 비롯하여
10여 동이
전소(全燒)했다.
이후
1988년 명봉사 주지스님인
봉명당 성면선사(鳳鳴堂
性面禪師)가
중창(重創)하여
현재(現在)
국내
제2지장
보궁(寶宮)으로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으로
이름 있는 지장보궁(地藏寶宮)으로
제1보궁 철원
심원사,
제2보궁 예천 소백산
내원암,
제3보궁 선운사 도솔암이
있다.
내원암에는 국보급
유물로 범종(500관)과 법당 용마루에
청기와 2점,
법당이
내9포,
외
13포로 된 문화가치가
풍부한 건축물이 존재해 있었던 곳으로,
6, 25 사변으로 인하여 값진
유물들이 모두 소실(消失)되었다.
소실 원인은
북한(北韓)
군인이 이곳
소백산(小白山)으로
집중(集中)
퇴각(退却)하는 길목으로써
아군(我軍)에 의해
작전상(作戰上)
방화(放火)로 모두
전소(全燒)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내원암은 명봉사
입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태고적 원시림이 하늘을 가린체 울창하게 우거지며 계곡 깊숙한 곳에 위치했는데 어찌 적군이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불타기 전 내원암은
법당1동,
동요사채,
서요사채,
조양루,
오백나한전,
조사전,
독성각,
산신각,
종각,
큰 대중방사동 등의
10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절앞의 복원 조감도를 살펴보면 그 규모가 어떠한지 상상이 간다.
현재 내원암은 중창
불사중으로 모두 완공되면 명봉사보다 더 큰 사찰이 되지 싶다.
내원암은 예천을 지장
성지로 크게 발전시키고 지역불교를 문화자원화하고 역사적 가치성을 재발굴하여 지역 관광자원의 토대로 삼고자 성지 복원에 불심으로 전력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불교의 성지(聖地)로 우뚝 서있을 예천
내원암을 그려보며 내 마음의 욕심을 다 비우고 내려오는 길가로 소백산 깊은 산자락의 단풍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물이 명봉계곡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명봉산 자락에 봉안된
2개의 태실터는 우리
예천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봉황이 크게 울었다는
명봉사는 예사로운 곳이 아니라 천하명당 길지에 있는 사찰이다.
그리고 새롭게 복원된
문종대왕,
사도세자 태실터
이야기를 잘 조명하여 관광자원으로 재탄생할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예천은 봉황이 먹고
마신다는 샘물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기 좋은 이상향의 땅 상서로운 고장이다.
장자(莊子)에서 말하는
예천(醴川:甘泉)이 바로 우리
예천(醴泉)이다.
봉황(鳳凰)과 관련된 우리 지역
문화유산 답사로 명봉사(鳴鳳寺)를 다녀오면서 단물이
솟아나는 샘물의 고장,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 사는
예천(醴泉)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랜 세월 잠에서
깨어나 ‘세계를 향한 봉황의
힘찬 날갯짓’을 표현하는
조형물이라도 하나쯤 세웠으면 어떨까 싶은 바램을 가져본다.
아울러 멀지않은
미래에 명나라 장수 양호가 탄복한 주천(酒泉)의 물맛을 보고
금강산(金剛山)
온천수와 수질이 같은
예천온천(醴泉溫泉)에서 온천욕을 하고
봉황(鳳凰)이 크게 울었다는
명봉사(鳴鳳寺)
태실터에 올라 하늘의
기운을 받아보고자 전국에서 예천(醴泉)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상상해 보았다. [예천읍행정복지센터 장광현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