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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장님]살기좋고 인심좋은 아름다운 마을 만들 것..고평2리 권인섭 이장!

청솔댁 2017. 2. 10. 14:44



첫째 서로 칭찬하기 운동, 둘째 화합하기, 셋째 잘사는 마을 만들겠습니다...3가지 마을 동훈을 정하고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고평2(高坪2) 권인섭 이장(64)은 황무지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마을 발전을 위해 올 한해도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11(4.7km) 거리에 있는 고평2리는 마을 앞을 경북선 철도가 지나가고, 내성천이 동남으로 마을을 감싸 안으며 흐르며, 서쪽으로 청복2, 남쪽으로 고평들판, 북쪽으로 동본2리에 접해 있다. 고평리는 금마교를 중심으로 흐르는 통평천을 경계로 1, 2리로 나눠진다.

 

 

마을 뒤로는 구릉성 산, 앞으로는 내성천과 드넓은 들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농촌 취락 형태 마을로 야성 , 반남 , 안동 , 청주 , 기타 성씨로 이루어져 있다. 고평272가구(5개반)143(남자 72, 여자 71)이 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69(44%)으로 90세이상 3, 최고령자 김원순씨로 92세. 1972년 인구가 592명으로 최고를 기록 후 감소하기 시작해 1979400명선, 1990년부터 300명선 이하로 급격히 감소했으며, 노인인구가 44%로 초고령화 인구 형태를 이루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마을 주민 중 전업농가는 42가구(58%)로 고령자를 제외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특산물은 쌀이 대부분으로 기타 단무지(5ha), 쪽파(6ha), (2ha), 수박 등이 재배된다. [참고자료] 1972인구현황 101가구 592(300, 292) 최전성기

 

 

마을 입구에는 팔각정(관풍정)이 있고, 표지석은 황수만씨가 198545일 세웠으며 앞면에 觀豊亭 기념식수, 뒷면에물맑고 경치좋고 인심좋은 이곳 가수리 관풍대에 쉬어 간들 어떠리라고 음각되어 있다. 또 애향(愛鄕(20038) 표지석과 고평제사적비(高坪隄事蹟碑)가 있다.

 

 

고평2(高坪2)에는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슈퍼가 2곳이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업되었으며, 마을 입구의 88슈퍼 빛바랜 간판이 그 옛날의 영광을 말해주는 듯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버티어 있다. 마을 면적은 고평리 전체 면적 3,894,522.5(772,867, 1,262,852.5, 과수원 4,903, 임야 565,734)로 고평들판의 농경지는 대부분 고평2리에 포함된다.

 

 

고평2(高坪2)는 산업시설로 농협 고평창고, 고평정미소(김중일)가 있고, 종교시설로 고평교회가 있다. 고평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영주노회유지재단, 예천읍 고평리 545)1987년 건축된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개척교회로서 신자수가 40여명 정도로 아주 작은 교회이다. 고평2리 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65세가 넘는 노인들이다.

 

 

그리고 엄마 없이 아빠와 또는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이준연 목사(58)는 공부방 개설, 등하교 승합차운행, 아이들 간식 및 방과 후 야외 체험활동, 목욕시켜주기 등의 목회자 활동을 하며 고평2리 마을의 구심점 역할이 되고 있다.

 

 

고평리(高坪里)1420년 거제 씨와 야성 씨가 처음 개척하였고 1580년 경에는 경주 , 진주 씨가 정착했는데 이 때 전자는 안골(2), 후자는 부리실(1)이라 정했다. 1600년경 좌의정 약포 정탁이 고사평(高士坪)이라 이름지어 개칭했다.

 

 

구한말 까지는 예천군 승도면(繩刀面)의 구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동읍내면 통명동 일부를 병합하여 보문면에 속하면서 고평동이라 개칭됐으며, 1961년 행정 운영 동리 설치로 고평 1, 2동으로 분동 됐다.

 

 

19832월 행정 구역 개편으로 고평동이 예천읍으로 편입되었고 1988로 변경됨에 따라 고평리가 됐다. 고평리는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고 동쪽으로 내성천이 흐른다. 내성천의 물길보다 높고 넓은 들을 향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고평리라 칭하게 됐다.

 

 

고평2 주요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가수내(佳水川), 가시네는 고평2리 안골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마을앞을 흐르는 실개천 옆의 우물이 만병통치의 영약이라 하여 먼 곳에서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어 물맛이 좋고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가수내(佳水川)라 했으며, 수해로 제방을 만든 후부터 없어졌다. 현재 마을 입구의 마을로 21가구가 살고 있다.

 

 

고평(高坪), 고사평(高士坪), 역앞, 안골, 안곡(雁谷)은 고평2리 경북선 고평역이 있어 역 앞이라고도 하나, 내성천의 물길보다 높고 넓은 들을 향해 생긴 마을이라 하여 고평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에 약포정탁(藥圃鄭琢)이 임진왜란(1592)을 수습하고 물러와 살던 곳으로, 그 때는 높은 선비가 산다하여 고사평(高士坪)이라 불렀다 하며, 현재는 동네 앞에 제방이 둘러있어 안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경로당이 있는 마을로 46가구가 살고 있다.

 

 

다래끝 지명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날에 다리가 있어 다리끝으로 부르다 다래끝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천진호양궁장 입구에서 호명방면 0.2km 지점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예천읍 청복2리 월촌마을, 용정마을, 새마 마을과 인접되어 있고 국도 34호선이 고평들을 가르며 지나고 경계를 이루기에 실 생활권은 청복2리라고 볼 수 있다.

 

 

청복교회와 주막집(담배점포)가 있고 현재 5가구가 살고 있다.[참고자료] 자연부락명 : 고평1불우실, 사당골, 솔친정, 한길건너 고평2안골, 가수내, 다래끝, 리별경계 금마교(통평천) 고평2(高坪2)의 주요문화재를 살펴보면, 약포정탁(藥圃鄭琢) 선생 영정이 모셔진 정충사(靖忠祀 고평리 466)가 있다.

 

 

약포정탁(藥圃 鄭琢 1526~1605)은 청주정씨이고 조선중기 문신으로 대사헌을 비롯한 6조 판서를 역임하고 좌.우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를 지냈다. 임진왜란시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고 죽음을 무릅쓴 상소(신구차)로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구원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여 전란의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영의정으로 증직 되었다.

 

 

정충사(靖忠祀)는 약포정탁 선생의 우국(憂國), 충군(忠君), 애민(愛民)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1년 국비로 약포의 유덕을 기리는 정충사를 짓고 보물 제487호 약포영정, 보물 494호인 약포유고(藥圃遺稿) 및 문서 13점과 비지정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반유정려각(潘濡 旌閭閣 고평리 465-3)은 예천읍 고평리 역전(驛前)1418(태종 18)에 효자 반유(潘濡, 1374-1437)를 위해 세운 비각이다. "父湧貴卒 哀毁伏塚 泣血三年 未現齒 嘗事聞旌閭"라는 명문(銘文)이 게재(揭載)되어 있다.

 

 

원래 고평리 가시내에 세웠으나, 옛날 홍수로 인하여 천방이 터져서 보문면 신월리 독정(讀亭)으로 옮겼다가 1976년에 다시 현위치로 옮겨 세웠다. 정려비(旌閭碑)는 시멘트 기단 위에 비신(碑身)과 화관(花冠), 비좌(碑座)로 구분되어 있다. 비신 전면에 "효자 반유지 비(孝子潘濡之碑)”라고 주칠(朱漆)로 음각되어 있다.

 

 

비문 내용은 "아버지 용귀(湧貴)가 죽자 무덤 앞에 엎드려 슬피 울면서 3년 간 남과 웃지 않았다. 이 일을 임금이 듣고 정려(旌閭)하였다.(父湧貴卒 哀毁伏塚泣血 三年 未嘗現齒事 聞旌閭)”화관의 크기는 가로 47cm, 높이 26cm, 두께 17cm이고, 비신의 크기는 폭 38cm, 높이 56cm, 두께 15cm, 비좌는 가로 57cm, 세로 23cm, 높이 29cm이다. 정려각 중수기에는 "乙卯九月"로 적혀 있다.

 

 

현재 정려각은 관리가 되지 않아 폐허로 변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들고 있다. 매포사당(梅圃祠堂 고평길 70-15)은 야성 씨 조상들의 신주(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 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은체 방치하고 있어 허물어지기 직전에 있어 정비가 시급하다고 본다. 사당 옆에는 수령이 오래된 참나무2, 팽나무 1그루가 있다.

 

용알(龍卵)은 중간샘안에 들어있는 돌멩이로 조선 선조때 정탁(鄭琢)이 고평동에 집을 짓고 우물을 팠으나 웬일인지 아무리 깊게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애를 쓰다 낮에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이 꿩알 만한 돌을 주면서 이 알을 파던 우물 속에 놓으면 물이 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 용문면 금당실에 볼 일이 생겨서 살던 옛 집터에 들렀더니 꿈에 보았던 알과 같은 돌이 있어 갖고와 우물 속에 넣었더니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 마을 경로당 옆에 있다.

 

 

고평제사적비(高坪隄事蹟碑)는 가수내 북쪽 둑에 있던 비석이었는데, 마을 입구 관풍정(觀豊亭)으로 이건했다. 비 유래는 고평들에 큰 둑이 있었는데 임진년 장마에 모두 무너졌으므로 관찰사 이경재(李景在)와 군수 김기순(1841년 부임)이 더 쌓아서 수해를 완전히 막았는데, 마을 주민들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고자 세웠다.

 

 

망곡재(望哭峴)는 국상(國喪)이 나면 동리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서 백립(白笠, 흰 갓)을 쓰고 북쪽을 향해 망곡(望哭)을 했다하여 망곡재(望哭峴)라 부른다고 전해오고 있다. 지금의 안골 뒷산에 해당되는데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고평역(高平驛)은 김천-영주 경북선 기차 정거장으로 19311016일 영업 개시, 1944101일 점촌 ~ 안동간 경북선 폐선으로 폐역, 19661011일 점촌~영주간 개통으로 배치 간이역으로 영업 재개, 1972720일 배치 간이역(역무원 근무)에서 무배치 간이역으로 변경, 199811일 여객 취급 중지, 200171일 폐역 되었다. 긴 세월 숱한 애환을 간직했던 고평 역사(驛舍)는 철거되고 빈터로 남아있다.

 

권인섭 이장은 고평2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예천 토박이다. 권 이장은 19914월 이장 선거에 다수의 후보자가 출마했으나 권 이장의 덕망에 모두 포기를 하여 단독후보에 마을 주민 합의 추대로 이장에 선출되어, 26년 동안 선거 없이 재심임을 받아 이장직을 수행하면서 성실한 자세로 각종 민원 및 불편사항 해결을 위해 발로 뛰며 적극적으로 봉사 하는 등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권 이장은 벼농사(2.7ha)와 특수작물(쪽파 2ha, 수박 0.5ha, 단무지 4.0ha) 축산(한우 70)을 경영하며 조수입이 억대가 넘는 전문농업경영인이다.

 

[참고자료] 고평2(高坪2) 역대 이장 연혁(沿革)

재임기간

성 명

~ 1983. 2.13

정용태(鄭用太)

1983. 2.15 ~ 1989. 4. 7

송원익(宋元翼)

1989. 4. 8 ~ 1991. 3. 7

함춘근(咸春根)

1991. 4.15 ~ 현 재

권인섭(權仁燮)

 

1994년 주민편익증진(읍장), 1997년 반상회발전(지사), 1998년 쌀생산종합대책(대통령), 1998년 쌀생산증대(지사), 2001년 구제역예방(군수), 2005년 주민화합(읍장), 2005년 농지관리업무(지사), 2007년 대한재향군인회, 2012년 군정발전(군수) 유공 등 많은 표창을 수상했다.

 

권 이장은 예천라이온스에 2007년 가입 10여년째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예천쪽파작목반장을 맡으면서 현재 11가구(15ha)의 연조수익이 3억원이 넘을 정도로 예천 쪽파의 명성을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마을 회관은 1993년도 건축 후 리모델링 하여 경로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광역상수도는 2012년에 연결됐다. 마을 운영진 현황을 살펴보면 이장 권인섭(64), 영농회장 최해복(76), 노인회장 박찬동(80, 회원 45), 새마을 지도자 송이흠(65), 새마을 부녀회장 김희자(64)등이다.

 

자랑스런 출향인으로 박찬중(1949년생)씨가 있다. 박씨는 전)재경군민회장, 재경 읍민회장 역임, 재경 고향사랑 장학회 회장, 현 대성주류판매(), 대성 프랜차이즈 대표이사로 고향 모교(대창고) 지원, 예천 농산물 판매, 고향사랑 장학회 운영, 재경 군민회 활동, 고향 고평리 후원 등 고향을 빛내는 자랑스런 출향인이다. 고평리 박찬경씨가 동생이다.

 

마을유지로 청록 김주일(靑綠 金周鎰, 1937년생) 전 일본대사는 예천초~예천중~부산상업고등학교(14회 보통고시 합격), 국민대학교 학사, 와세다대학원 석사, 호주 시드니대학 수학, 예천군청(내무과 6개월), 경제기획원, 청구권 및 경제협력사절단, 청와대, 보건복지부,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및 일본경제기획청, 통계청, 서울시, 경제기획원(경제교육기획국장으로 복귀), 국회사무처, 외교부(주일본 대한민국대사관 및 요코하마 총영사)로 근무했다.

 

경력으로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민생복지분과위원, 한국농업기반공사 비상근이사, 삼한CI고문, 주일본국 민단중앙본부 서울사무소장, 경상북도투자통상자문관, 대한적십자사 경영합리화추진위원회 위원 겸 간사, 안동대학교, 도립경도대학 강사(재정학), JA코리아 청소년 경제교육강사를 역임했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NSI) 연구위원.회원, 현대미포조선 사외이사, 농림부 농정발전기획단 자문위원, ·일 협력위원회 이사, 와세다대학 한국 총동창회 운영위원 부회장, 한누리 포럼 고문, 예천군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안동김 대종회 중앙 부회장, 예천군화수회 회장, '건전재정포럼' 창립 발기인, 홍조근정훈장 수훈, 황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주요저서> 일본의 지방재정제도 해설, 민둥산을 푸른숲으로 가꾼 이야기가 있다.

 

하재춘(河在春 1935년생)씨는 85년 한국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 졸업, 57년 예천 유계, 미산초등 교사, 61년 봉화 물야, 예천 풍천(豊川), 인포(仁浦), 94년 예천초등 교장, 96년 예천 지보초등 교장을 지냈다. 교육부장관표창(4), 교육감 표창(3), 푸른 기장증(旗章證),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예천읍 고평길 90-11에 거주하고 있다.

 

송동익(宋東翼 1937년생)씨는 예천초등(39), 예천중(3), 경북고, 동국대 졸업, 60년 학사 경찰(學士警察)로 시작, 경사(搜査), 정보(情報), 대공(對共) 업무 등 경찰 요직을 두루 거쳐 95년 용인경찰서장(경감), 95년 경기청 보안과장, 97년 경기도 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현재 귀향하여 예천읍 고평길 87-10에 거주하고 있다. 고평2리 출신 행정관료 출신으로 송성흠, 송고흠, 송석흠, 권기태, 정형구, 김대회, 김정회 등이 있다.

 

고평2리는 이장을 26년째 하고 있는 권인섭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 전체가 화합하고 단합하여 잘사는 마을로 만들어 나가고자 펼치고 있는 서로 칭찬하기 운동을 통해 마을 주민간 불화가 줄어들고 이웃간 정이 넘치며 웃음꽃이 피는 마을이 되어 가고 있다.

 

경로당에는 매일 20여명이 나오는데 칭찬하기 운동을 통해 어르신들은 가족처럼 화목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이 마을의 자랑거리 이다. 마을 경로당 벽면에는 정용태(鄭用太) 고평 노인회장이 직접 쓴'훈회(5개항), 국민건강생활지침(8개항)’이 게첨되어 있다. 마을 주민간에 화합을 강조하는 내용과 건강과 관련된 글들이 담겨져 있다.

 

'훈회= 1. 마음()을 속이지 말라 2.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3. ()을 짓지 마라 4.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5. 남을 잘 되게 하라. '국민건강생활지침= 1. 환경을 생활화 합시다 2. 음식을 싱겁고 가볍게 골고루 먹읍시다 3. 예방접종과 건강진단은 때맞추어 받읍시다 4. 과음하지 말고 담배는 피우지 맙시다 5. 규칙적인 운동으로 신체의 활력을 유지합시다 6. 일하며 보람 찾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 갑시다 7. 공공질서 지키며 안전사고를 예방 합시다 8. 아껴쓰고 적게 버려 건강한 환경을 만듭시다

 

권 이장은 이장 재임기간 중 주요공적으로 납읍지구(1993), 고평큰들(1997)지구 경지정리 사업시 주민들은 농지면적이 줄어드는 것에 반대하여 큰 난황에 부딪혔으나, 앞날을 내다보고 기계화 작업이 원활할 수 있도록 대경지정리가 꼭 필요하다고 주민들을 끈질기게 설득 완공하여 현재 농기계, 차량의 원활한 통행이 가능해졌다. 또 마을 진입로 아스콘 포장을 비롯하여 하수도 복개사업, 농로포장 등 주민생활 편의 증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권 이장은 마을 경로당에 수시로 간식을 제공하고, 주민들이 시장이나 병원 등 급한 볼일이 있을 경우 바쁜 일과중에도 자신의 승합차로 태워주며 주민들의 손발이 되고 있다. 또 수시로 어르신 예천온천 목욕봉사 등 모든 어르신들을 내 부모처럼 공경하며 모시고 있어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에 권 이장은 고평2리는 가구별 소득이 낮다며 정이 넘치는 마을이 되자면 소득이 올라야 하기에 앞으로 다 같이 잘사는 마을을 위해 시설하우스 등 소득작목개발로 농가소득 증대에 힘쓰겠다고 했다또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현실에서 빈집활용, 농지 임대, 주택 마련 등 젊은층 인구 유입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 나가겠다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