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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장님]인심좋고 살기좋은 마을 만들겠습니다...왕신1리 김재덕 이장!

청솔댁 2017. 2. 18. 14:24



[우리마을 이장님]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다소 거칠다는 말을 듣지만 모든 것이 마을을 위한 일이라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우직함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왕신1(旺新1) 김재덕 이장(61)은 첫인상이 강인한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8년째 마을을 이끌고 있는 김 재덕 이장의 마을 사랑 이야기를 듣고자 왕신1리를 찾았다.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8(3.5km)거리에 있는 왕신1는 마을 앞으로 34번 국도가 지나고 예천의 젖줄인 한천이 드넓은 왕신들판을 풍요롭게 적시며 흐르고, 동쪽으로 왕신2, 청복1, 남쪽으로 호명면 내신.종산리에 접해 있다.

 

왕신1리는 신도청 직선도로 개설로 왕신리 교차로가 개설되어 도청 접근성이 좋아졌고, 국도 34호선 문경 방면 진출입이 가능한 왕신리 간이교차로가 설치될 예정으로 교통접근성이 좋고 한천이 자연 친화적인 주민 휴식공간으로 조성되며, 주변환경이 깨끗하여 전원주택지로 주목받고 있다.

 

또 한천고향의 강 조성사업으로 대왕교와 신대왕교 구간에 남녀노소가 경관을 감상하며 운동할 수 있는 파크골프장과 자연 생태원을 조성하고, 개포면 경진리 까지 한천 9km 구간에 친수공간, 수경시설, 자전거도로, 자전거 길을 마무리할 계획에 있다.

 

왕신1는 전체적으로 구릉선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큰 평야에 삼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농촌 취락 형태 마을로 의성 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경주 , 연일 , 예천 , 안동 , 순흥 , 인동 , 기타 성씨가 있다.

 

왕신1(旺新1)61가구(6개반)123(62, 61)이 살고 있으며,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48(39%)으로 초고령화로 접어들고 있다. 90세 이상이 6, 최고령자는 김종순(96)씨로 타 마을에 비해 장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왕신1 인구는 1972519명으로 최고점을 기록 후 1978년까지 500명선을 유지하다가 1979489명으로 줄어들다. 1990년대부터 200명선으로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 2000년대 이후 100명선으로 줄어들었다. [참고자료] 1972년 인구현황 93가구 519(253, 266)최전성기

 

마을 주민 중 전업농가는 46가구(75%)로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특산물은 쌀이 대부분으로, 쪽파(10ha), 참깨(4ha), 고추(1ha), (2ha) 등이 재배되고 있다. 한때 예천군이 전국 제일의 양잠군으로 명성을 이어갈 때 왕신1리는 양잠산업을 선도했으나, 화학 섬유의 확산 보급 등으로 양잠 산업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양잠산업이 기능성 식품산업으로 변화되고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다양한 양잠 산물이 지속적으로 개발돼 시장에 나오면서 시장규모도 커지면서, 양잠을 포기했던 농가들이 다시 뽕밭을 조성하는 등 사육규모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누에가공식품으로 생누에, 누에가루, 누에환, 누에홍삼원, 동충하초 등 다양한 건강 보조식품이 개발되면서 현재 김만길씨 외 7농가가 양잠업을 하며 농외소득을 올리고 있다.

 

마을 면적은 왕신리 전체 면적 2,215,740.2(496,972, 768,766.7, 과수원 6,886, 목장용지 16,286, 임야 505,520, 대지 86,059, 창고용지 4,274, 도로 148,597.3, 하천 66,913, 구거 95,124.2, 묘지 13,992, 잡종지 6,350)이다.

 

왕신리(旺新里)본래 예천군 남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왕상동(旺相洞), 신기동(新基洞)과 서읍내면의 홍심동(弘心洞)일부를 병합하여, 왕상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왕신동(旺新洞)이라 하여 예천면에 편입됐다.

 

 

1937년 예천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57년 행정 운영 설치로 왕신 1,2동으로 분동 후, 1988로 변경됨에 따라 왕신리(旺新里)가 됐다. 왕신1(旺新1) 주요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새터, 신기(新基), 신천(新川)은 왕신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날 어느 난리에 피난을 떠났던 의성 씨가 고향인 의성이 가까운 이 곳에 이르러 암석이 많은 돌밭을 지나는데 어느 풍수가 이르기를

 

 

'암석을 없애고 여기에 산다면 좋은 곳이다'라고 하여 정착하여 새로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여 의성 金珉이 새터라고 불렀다. 새터는 마을 개척당시 바위가 많았다고 하며 마을 앞으로 한천과 비옥한 들판은 매년 풍작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회관이 있는 곳으로 51가구가 살고 있다.

 

무심바우(無心岩)는 새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1980년에는 13가구가 살았으나 그후 이농현상으로 빈집이 많았으나, 귀촌 등으로 현재 10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앞(입구)에 있는 무심바우(無心岩)는 무서울 느낌이 들만큼 커다란 바위로, 그 바위 뒷골에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무서운 생각도 없이 무심히 마을을 개척하여 그 바위와 마을 이름을 무심바우(無心岩)라 전해오고 있다. 마을 안쪽 언덕자락에 무심바우(팔각정) 쉼터가 있다.

 

이 바위에 대하여 전해져 오는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오래 전 이 촌락에 정이 깊고 우애가 돈독한 몇 가구가 살고 있었다. 마을 주민 중에 방울장사를 하는 남편이 나간 후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매일 마을 앞에 하루같이 기다리다 지쳐 몸이 쇠약하여 진 부인은 언제나 기다리던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그 후 1년이 지나 부인이 죽은 자리에 평평한 큰바위가 생겨 났는데 그 형상은 마치 가만히 앉아서 앞을 내려다 보는 모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끝내 그 방울장사가 돌아오지 않자 그 바위를 무심바우(無心岩)로 불렀으며 마을 지명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현재 무심바우 주변은 잡목으로 둘러쌓여 잘 보이지 않는데, 주변 정비 및 전설 유래 안내판을 설치하여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갓명골은 무심바우 아래쪽에 생긴 마을로 마을 주위가 들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예전에 3가구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축사가 있다.[참고자료] 자연 부락명 : 왕신1새터(신천, 신기), 무심바우, 왕신2왕산골(王山谷), 방아실

 

왕신1의 주요문화재는 신천서원(新川書院 문화재자료 제139, 김영렬 좌명공신 교서(단서) 및 회맹록(유형문화재 제305), 1985.8.5. 지정)은 왕신리 412-2번지에 있으며, 관리자는 의성김씨문중(김홍국)이다. 신천서원은 조선 초기에 익대좌명공신인 맹암(孟巖) 김영렬(金英烈 13701421)의 유지를 받들고 후손을 교육시키기 위한 학원으로 1945년에 설립됐다.

 

김영렬은 조선 전기 무신으로 정종 2(1400) 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태종 1(1401) 익대좌명공신 3등에 오른다. 태종 4(1404) 참판승추부사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싸워 빼앗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을 세웠다. 후에 세종 3(1421)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1품 우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諡號(시호) 蘘昭(양소)를 하사했다.

 

서원 안에는 제사 공간인 경훈사와 교육 공간인 강당, 남덕문(覽德門), 출입문 등의 건물이 있고, 밖에는 신도비가 있다. 사당인 경훈사(景勳祠)에는 태종의 어필인 단서(丹書)와 김영렬(金英烈)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신천서원은 왕신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솔 숲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3·측면 1·맞배지붕 크기의 경훈사(景勳祠)와 정면 4·측면 2·8작 지붕 크기의 강당(講堂)만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의성 씨 문중에서 향사(鄕祠)를 지낸다.

 

김재덕 이장은 왕신1355번지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예천 토박이다. 김 이장은 20091월 마을 총회에서 주민 만장일치 합의 추대로 이장에 선출되었으며 성실한 자세로 각종 민원 및 불편사항 해결을 위해 발로 뛰며 적극적으로 봉사 하는 등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김 이장은 벼농사(6.6ha), 전작(1ha), 쪽파(1.0ha), 참깨, 땅콩, 축산(한우 7)을 경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왕신1(旺新1) 역대 이장 연혁(沿革)

재임기간

성 명

김홍율(金洪律)

~ 1976.12.31

김홍창(金洪彰)

1977. 1. 1 ~ 1981.12.31

김진섭(金震)

1982. 1. 1 ~ 1987.12.31

김정섭(金情燮)

1988. 1. 4 ~ 1998.11. 30

김홍국(金鴻國)

1998.12. 1 ~ 2009. 1.18

권태화(權泰和)

2009. 1. 19 ~ 현 재

김재덕(金在德)

 

1999년 농업경영인발전(경북농업기술원장), 2012년 군정발전(군수), 2013 도정발전(지사)유공 표창을 수상했다. 마을 운영진 현황을 살펴보면 이장 김재덕(61.영농회장 겸직), 노인회장 김만길(76.회원 50), 새마을 지도자 최정호(58), 새마을 부녀회장 윤해숙(61)등이다.

 

마을회관은 1978년에 290만 원으로 건평 30평의 마을회관(2)을 건립했다. 지금은 공간이 협소하고 시설이 노후화되어 사용하지 않아 개인에게 매각됐다. 마을 진입로는 2009L=1200M, B=3.5M 아스팔트 포장했으며, 마을 광역상수도는 2007년도에 연결됐다.

 

경로당(왕신리 355-4)2005년도에 기존의 노후화된 마을회관 대신 대지 380, 연면적 113,6600, 단층 시멘트벽돌조로 준공했다. 경로당 입구에는 연자방아(발동기가 없던 옛날에 말이나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하였던 방아의 일종)와 경로회관 준공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앞면에 마을유래비, 측면에 노인회장 김기섭, 추진위원장 김만길, 이장 권태화, 지도자 김영수, 부녀회장 안영화, 시공자 정택상, 뒷면에 경로당건립 성금내역 명단이 표기 되어 있다. [참고자료] 경로회관 준공기념비 : 이곳 예천읍 왕신1리는 새터(신기)와 무심바우(無心岩)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사백여년전 의성 金珉이라는 분이 이곳에 처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하여 새터라고 부르고 있다. 소백의 한줄기가 이어 내려와 북쪽은 아늑한 정산(正山)을 이루었고 다시 남으로 사접산(射接山)이 에워싸며 그 기슭에 마을을 이루었다.

 

그 모습이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하여 모래펄에 날아 앉는 기러기 형상으로, 풍수설로 보면 장수와 부귀, 화합, 번창을 의미하는 길지다. 또한 마을 앞을 흘러가는 맑은 한내를 따라 넓고 기름진 들판이 아득히 펼쳤으니 농사짓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 복되고 살기 좋은 천혜의 땅에서 우리 주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풍요롭게 살고 있고 또, 앞으로 길이길이 번영과 행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 있던 좁고 낡은 마을회관을 헐고 온 주민들이 알뜰히 모은 성금 삼천구백만원에 군비 오천만원을 더하여 회관을 새로이 짓고 오늘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20051115일 예천읍 왕신1리 주민일동.

 

경로당 안 벽면에는 경존상해(敬尊相愛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며 사랑하자),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성품. 곧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을 이른다), 원봉 김광일씨가 쓴고향생각한시와 노인회장이 쓴그대가 없을 때 그대를 칭찬하고,

 

그대가 있을 때 그대를 존중하며, 그대가 괴로울 때 그대를 도와주라는 글귀가 표구로 만들어져 걸려 있다. 이처럼 왕신1리는 조상들의 가르침을 받아 덕목을 실천하고 있기에 주민간 서로 존중하며 우애가 깊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런 출향인으로 김창우 서기관(경상북도 안전행정과장)은 김항영의 로 예천초~예천중~대구상고를 졸업했으며, 도청향우회장을 맡아 지역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서예가 김준섭(76)씨는 한국 서예국전 심사위원장과 운영위원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서예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6년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여 받았다. 남산 충혼탑의 충혼비 글씨는 그의 친필이다.

 

마을유지로 김정섭씨(80.金貞燮)는 한학자로서 신천서원을 관리했으며, 의성 씨 문중의 큰 어른으로 주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다. 김진섭씨(75.金震)는 예천양잠조합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의성 씨 예천군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만길씨(76.金萬吉)는 예천양잠조합 이사를 맡고 있다.

 

의성 씨 집성촌을 이루는 왕신1리는 한학자들이 많으며, 주민들간 상부상조하고 서로 칭찬하기와 이웃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때문에 주민간 큰 다툼이 없고 독거노인의 경우 끼니를 거를 수 있어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며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 반찬 등 부식은 주민들이 십시일반 가져오기에 큰 어려움이 없으며, 생일, 칠순 등 큰일이 있으면 경로당에서 주민 전체가 모여 축하를 해주고 있기에 마을 어르신들은 경로당에 오면 참 좋고 행복하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또한 경로당 안과 주변은 새마을부녀회장을 비롯한 봉사하시는 분들이 수시로 닦고 청소하고 있어 늘 깨끗하다며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하는 등 마을 주민 전체가 화합을 하며 오순도순 서로 정겹게 살고 있는 것이 마을의 자랑거리이다.

 

김 이장 재임기간 중 주요공적으로 왕신리 재경지 지구(왕신리 594~왕신리 495-1) 버스노선 시멘트 포장공사(L=1000M, B=3.5M), 마을 안길 아스팔트 포장(L=1200M, B=3.5M), 호명 종산리 방향 도로 포장공사(L=200M, B=2.3M 자력사업), 왕신리 494-13 임도 포장공사(L=250M, B=2.5M),

 

왕신리 450-1(대지)~527(구거)구간 U관 매설공사(L=200M, B=1M) U관 복개 및 포장공사((L=100M, B=3M), 왕신리 449-1~429-1 구간 마을 안길 확·포장공사(L=20M, B=5M, H=1.5M), 왕신천 확장공사(L=400M, B=17M 10억원) 등 그동안 이루지 못했던 오랜숙원사업 해결로 주거환경이 몰라보게 좋아지게 된 것은 김 이장의 뚝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왕신1리의 마을 숙원 사업은 김 이장 재임기간 동안 거의 다 해결되었으며 앞으로 마을 앞 U관 교체(L=2000M)가 남아 있다. 또한 현재 빈집 6개 동을 잘 정비하여 도시민 귀농, 귀촌 인구 유입에 적극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 이장은 성격이 급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해 다소 과격하게 보이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근본 성품이 어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은 무슨 수를 쓰서라도 이루어 내겠다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다.

 

김제덕 이장을 처음 접하다보면 터프한 성격으로 다소 거리감을 가질 수 있겠으나, 알고 지내면 경상도 사나이다운 기질로 뚝심 있게 일을 처리해 나가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다.

 

자기가 태어난 마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랑하는 김 이장은 다른 마을보다 왕신1리가 더 잘살고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늘 노력하며 우직하리만큼 고집스러운 원칙을 세우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기에 왕신1리 마을은 늘 웃음꽃이 피어나는 행복한 장수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