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소식

[우리마을 이장님]예천읍 최고의 명품 마을로 만들겠습니다..왕신2리 김주원 이장.

청솔댁 2016. 11. 24. 18:56



"평생 고향과 함께하며 마을 지킴이 역할에 인생을 다 바치겠습니다" 예천읍 최고의 명품 마을로 만들고자 불철주야로 노력하는 왕신2(旺新 2) 김주원 이장의 다부진 일성이다.

 

 

예천의 젖줄은 한천(漢川)이다. 그리고 한천의 젖줄이 너른 왕신 들판을 품에 안으며 풍요롭고 살찌게 하듯 언제나 풋풋하고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는 왕신2리 마을은 30여 년간 마을 발전과 주민소득 증대에 힘쓰고 있는 김주원 이장(63)이 있다.

 

 

왕신2리는 예천읍 중심지에서 동남쪽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외곽지로 84가구에 175(남자 84, 여자 91)이 살고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다. 한때 왕신2리는 양잠집단마을 조성으로 예천의 양잠산업을 선도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며 벼농사와 오이작목반의 소득이 농가들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다.

 

 

신생아 출산의 급격한 감소로 인한 농촌의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이 오늘날 모든 농촌의 실상이지만 왕2리는 50대 이하 젊은 층의 인구가 25여명이나 되어 젊고 활기찬 마을로 타 동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왕신2리 성씨별 분포를 살펴보면 안동권씨, 의성김씨, 김해김씨가 주를 이루고 이, , , , 정씨 등 집성촌이 아닌 여러 성씨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럼에도 왕신2리는 성씨 간 대립과 갈등이 전혀 없이 화목한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김 이장은 마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다 보니 늘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김 이장은 학교 졸업 후 4H와 새마을지도자 활동을 하면서 언제나 자기일처럼 마을일에도 앞장서며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을 눈여겨본 주민들이 1985년 그 당시 30대 초반의 나이로는 감히 꿈도 못 꾸어볼 마을 이장에 만장일치 합의 추대형식으로 선출되어 지금까지 마을 일을 보고 있다.

 

 

이장 일을 중간에 5년간 잠시 놓은 적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이장을 맡아 보던 중 마을 운영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자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마을 이장을 다시 맡아 달라고 하여 지금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공명정대하게 마을일을 처리함에 주민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다고 할 수 있다.

 

 

이장을 하면서 공적을 열거해보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크게 두 가지만 꼽아본다. 첫째는 행정구역상으로 예천읍이나 왕신2리는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주민들이 버스를 타려면 무거운 짐을 들고 큰 길까지 걸어가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에 비좁은 마을 안길을 새마을 사업으로 확포장하고 14회 시내버스가 운행하게 되었는데 마을 안까지 시내버스가 들어오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하나는 마을회관이 낡고 협소해 마을행사와 주민화합에 어려움을 겪던 중 군비 5천만 원과 주민, 출향인들이 한마음으로 모은 5100만 원의 성금으로 200412월에 준공된 2층 건물은 1층은 경로당 및 회관으로 2층은 건강 관리실(찜질방, 샤워실)로 이용되면서 주민들의 편안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이장은 왕신2리의 자랑거리로 두 가지를 꼽았다. 예천이 세계 양궁의 메카로 그 위상이 높아진 저변에는 국궁과 화살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80% 정도가 활의 본산인 예천읍 왕산(王山)골 출신으로 예부터 왕신 2리는 궁경(弓京)이라 할 만큼 국궁제작이 성()한 곳으로 전국 국궁 장인들의 원류(源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궁시장' 궁장(활 제작)의 보유자' 권영학(73)씨가 왕산골(왕신2)출신이며, 마을 주민들은 이처럼 궁술의 고장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많던 국궁 제작자들이 산업 발전으로 국궁이 시장에서 밀려나면서 점차 사라진 지금은 예천 국궁전수관(왕신길 245)에서 한국 국궁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왕신(旺新)이란 지명은 왕산동, 신기동, 홍심동 일부를 병합하면서 왕산과 심기의 이름을 따 왕신리(旺新里)라 하였다. 자연 마을로는 새터(왕신1), 방아실(왕신2), 왕산골(왕신2)이 있다. 방아실 마을은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방아처럼 생겼다 하여 칭해진 이름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김 이장은 방아실이 아니라 방화(芳花)실이라며 그 근거로 마을 형상이 방아를 닮지 않았으며 전해져 오는 말에는 꽃이 많이 심어졌다고 해서 방화실이 맞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의견을 내 보였다. 이와 관련 마을 지명 유래를 정확히 알고자 했으나 연륜이 높은 어르신들조차도 그 정확한 뜻을 모른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왕산(王山)골이란 지명은 마을 뒷산의 산세가 세번의 굴곡이 있는데 하늘에서 이를 내려다보면 '임금왕()'자 모양으로 되었다 하여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왕산재(王山嶺)'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그리고 예천군 민선군수인 김수남(2~4), 이현준(5~6) 군수가 이곳 왕산골 출신이다. 이는 먼 훗날을 예견한 옛 선현들이 지은 지명과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것에서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떡하던지 간에 왕신2리 주민들은 민선군수 두 분이 왕신리 출신이란 것에 큰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아울러 왕신(旺新)이란 지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王'이 '旺'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제의 간악한 술책으로 큰 인물이 태어나지 말라고 '王'자는 죄다 '旺'자로 바꾸었는데

 

 

이는 '일본왕()'이라는 것으로 해석 된다. 왕산골 마을 뒷산이 '임금왕()'자 모양으로 된 것만 보아도 일제 때 개명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이 역시 정확히 그 근원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왕신리는 상서로운 ''의 기운이 왕성하게 서린 곳으로 길지(吉地)가 아닌가 싶다.

 

 

김 이장이 지금까지 무탈하게 마을을 잘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은 마을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작용한 것도 있겠지만 본디 타고난 품성(品性)이 어질고 행실도 비교적 청렴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회관 주변을 둘러 볼 때면 언제나 먼지, 흙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빈틈없이 되어 있다. 이는 이장 내외분이 매일 청소를 하며 관리를 하기에 가능하다.

 

 

마을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김 이장은 마을의 큰일은 운영위원들과 협의하여 처리하며 동네일을 내일처럼 만사 제치고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기에 돌아서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이 없으니 예천 최고의 이장이라 불리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그 어느 곳보다 젊은 일꾼이 많은 왕신2리는 반평생 마을을 위해 앞장서는 김 이장에게 크나큰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예천 나아가 전국 최고의 명품(名品)마을로 만들겠다는 김주원 이장이 있기에 그 미래는 매우 밝고 희망차다고 생각되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