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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이장님]26년째 이장 맡아..예천읍 최장수, 최고령 서본2리 이창우 이장

청솔댁 2016. 11. 24. 18:50

 



[우리마을 이장님]강산이 세 번 바뀌는 오랜 세월동안 마을 주민들의 손발이 되어 묵묵히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예천읍 서본2(西本2) 이창우(75) 이장은 올해로 26년째 이장일을 맡고 있는 최장수이자 최고령 이장이다.

 

 

이 이장이 지나온 시간들은 예천읍 마을의 변천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한해 한해를 뒤돌아보면 회한이 많다고 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마을 주민들을 위해 남은 여생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 이장의 얼굴에서 세월이 비켜가는 듯 열정이 가득 넘쳐 보였다.

 

 

서본2리는 예천읍사무소 기점 승용차 기준 3(0.7km) 거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서본1, 서쪽으로 대심3, 북쪽으로 흑응산이 남쪽으로는 남본1리가 경계를 이룬다. 서정자(西亭子)들의 약 절반이 서본2리 농경지로 포함된다.

 

 

시가지 도로인 효자로와 충효로, 역전길을 끼고 있으며 기존 예천읍 도심지역과 신시가지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일상생활 및 교통이 편리한 마을이다. 과거 오래된 건축물들로 인해 낙후된 지역은 최근 들어 재개발에 따른 아파트, 원룸이 들어서면서 예천읍의 신 주거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공공시설로 예천군 문화회관, 예천군노인복지회관, 대한노인회 예천군지회,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원 경북지원 예천사무소, 예천경찰서 예천지구대, 한국국토정보공사 예천지사, 예천농협 농산물유통사업소, 예천역이 있다.

 

 

주요시설로 예천성당, 교회(예천통일), 모텔, 편의점, 미용실, 상가, 어린이집(성심어린이집, 샛별어린이집)이 있으나 시내 중심가에 비해 상가 점유율이 낮고 주택이 더 많은 형태로 아파트, 원룸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예천 기차역은 1931년에 설치 됐다. 이후 1944년 안동~점촌간 철도가 철거 되었다가 1966년 경북선(김천~영주) 철도로 다시 복구됐다. 하루 부산 3, 영주 3, 경북관광순환열차 1회와 주말열차(정동진~부산) , 일 각 1회 등이 운행되고 있다.

 

 

서본2리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 취락 형태 마을로 안동 , 김해 , 밀양 , 경주 , 기타 성씨로 이루어졌으나 산업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지금은 도시화로 변모하는 과정으로, 농업인 보다 자영업이 더 많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마을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면서 굴머리를 기준으로 두 개의 마을처럼 이루어져 경로당이 각각 따로 있다. 서본2리에는 현재 병의원, 약국이 없어 주민들이 시내 중심가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서본2(西本2)384가구(14개반)873(남자 452, 여자 421)이 살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359(65세 이상 41%)으로 고령화가 높다고 보며 주민 중 전업농가는 86가구(22%), 주요 특산물은 쌀이다.

[참고자료]1976 인구현황 380가구 1,843(946, 897) 최전성기

 

 

마을 면적은 서본리 전체 면적 1,200,068(111,184, 285,253, 과수원 13,452, 임야 295,666)로 농경지는 모두 서본2리에 포함된다.

 

 

서본2(西本2)는 본래 예천군 서읍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本洞과 남읍내면의 본동 일부를 병합하여 서읍면과 본동의 이름을 따서 서본동이라 하여 예천면에 편입됐다. 1919년에 굴모리에 굴(三益隧道)을 확장하면서 늪지대가 대지로 변했다. 1937년에는 예천읍 서본동이 되고, 19531015일 서본 1,2동으로 분동 되었고 1988로 개칭됐다.

 

 

자연마을로는 박샘(지고개), 당곡, 호혹골(상시당골)이 있었다. 박샘(酒泉)은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생긴 이름이다. 전에 술이 나왔다하는데, 한 바가지만 떠 먹어야되는데, 욕심 많은 사람이 두 바가지를 떠먹은 뒤로부터 술이 변하여 물이 되었다고 한다.

 

 

당곡은 산수당이라는 신당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년 음력 415일에 남자의 화상을 걸어놓고 별신굿을 하여 제사를 지낸다. 호혹골은 흑응산성 밑에 있는 마을로, 옛적에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과녁을 세워놓고 활 쏘기를 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본2리의 자연마을은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상시당, 지고개, 비석골(드림파크 주변), 굴모리, 한일주택, 역전마을 등으로 변했다.

 

 

서본2리 경계는 예천중앙교회에서 세광빌라 앞 골목길 기준 대심리 방향, 도시계획도로 위(상시당길)가 서본2리이며, 서쪽으로는 문화회관, 이원퍼스터 아파트, 충효로 아래 역전길, 예천역까지이다. 서본리 경계를 조사하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서본리가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는 것이다. 항공영상(Daum지도)을 보면 신예천교(충효로)를 경계선(휴전선)으로, 북쪽은 산악지대, 남쪽은 평야지대, 동쪽은 바다(한천), 흑응산은 백두산으로 생각하고 본다면 한반도 지형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서본2(西本2)의 전해져오는 자연마을 지명 유래를 살펴보면 굴모롱이굴(林椿遷)은 굴머리에 있는 굴로 임춘(林椿)이 이 굴을 뚫어서 한천의 물을 끌어다가 서정자(西亭子)들 용수로 사용하게 했다. 임춘천(林椿遷)은 굴모롱이에 있는 벼랑으로 전에 큰길이 현산 꼭대기로 나서 매우 곤란하였는데, 임춘이 이 벼랑을 깎아 내어 길을 내고, 또 굴을 뚫어서 물길을 만들어서 서정자들의 몽리(蒙利)를 도왔다.

 

 

비선거리()은 쥐고개 남쪽에 있는 길로 군수(郡守) 유건환(兪建煥), 이인성(李寅聲), 지응주(洪膺周)의 선정비가 있었다고 하여 주민들은 비석골로 불렀으나 선정비는 도로 확장으로 19764월에 남산공원으로 이건(移建) 했다.

 

 

지고개(고개, 酒峴, 쥐고개)는 서본리에서 대심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모양이 쥐처럼 생겼다. 고개 밑에 주천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2차선 도시계획도로가 개통되어 대심리와 시내가 연결되는 교통량이 가장 빈번한 고개로 변했다. 상시당, 향사당골은 흑응성 서남쪽 밑에 있는 골짜기에 이루어진 마을로 홋골 아래쪽이 된다. 지금의 벧엘 기도원 올라가는 마을이다.

 

 

홋골(虎谷), 솟골, 효골(孝谷)은 상시당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두가지가 전해진다. 옛날 나뭇꾼이 도끼로 나무를 하다가 호랑이를 만나 싸우다가 죽었다고 호골(虎谷)이라 불렀다. 옛날 어느 효자가 여기 살면서 범의 보호를 받아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그래서 효골이라 부르던 것이 호골로 변했다고 한다.

 

 

역전(驛前)마을은 1931년 경북선 예천 기차역이 설치되면서 마을이 생겼고, 대한통운, 농협창고, 정미소, 여인숙, 다방, 술집, 상가 등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대중교통 이용객 감소로 찾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어 옛 명성을 거의 잃어가고 있다.

 

 

한일주택단지는 서본리 82번지 일원에 한일신용협동조합이 대지를 조성하여 현대식 주택 33동을 1980년에 지어 조합원들에게 분양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현재 50호 정도 거주 하고 있다.

 

 

서본리 72-4 번지(굴머리)에 있는 삼익수도(三益隧道)850여년전 고려 무신정권때 벼랑을 깍아 길을 내고 암반을 뚫어 그 아래로 수로를 만들어 시가지 배수 및 원활한 농업용수 공급을 해 온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1170년경 예천임씨의 시조인 서하(西河) 임춘(林椿)이 당시 지형이 인마(人馬)의 통행이 불편하고 수만 평이나 되는 서정자(西亭子)들의 논에 농업용수가 부족한 것을 해결키 위해 시행한 대역사로 임씨의 이름을 따 임춘천(林椿遷)이라 불렀다.

 

 

그 뒤 임유정이 늪지대였던 굴모리를 개척해 유정수라 불리워졌으나 1919518일 예천군수 이범익(李範益)이 수로를 보완해 수로를 냄으로써 읍내 배수가 잘되게 하고 사람의 통행이 편리하게 했으며 농업용수를 원활히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3가지 유익함이 있다는 뜻으로 삼익수도(三益隧道)로 이름을 바꿨다.

 

 

삼익수도 둘레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이름을 굴모롱이에 있다하여 굴모리 혹은 굴머리로 불렀으며 지금까지 주민들은 굴모리, 굴머리로 부르고 있다.

 

 

20003월 예천군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수로의 고저가 맞지 않아 배수가 원활히 하지 못해 폭우에 시가지가 침수되는 불편이 있어 38억원의 예산을 들여 굴모리 대하수도 정비사업을 펼쳐 당시의 배수로를 폐쇄시켰다.

 

 

현재 배수로는 높이 2m 너비 3m정도의 수백년전 터널모양의 형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현장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으나, 안내판이 없어 배수로의 입구를 잘 찾지 못하고 입구는 폐자재 등으로 막히는 등 관계기관의 무관심으로 그 의미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고 하겠다.

 

 

삼익수도 송덕비(三益隧道 頌德碑)는 삼익수도를 확장하는데 공을 세운 이들을 위하여 군민들이 세운 공덕비로 "大正 8(1919) 5군수(郡守) 이범익(李範益), 면장(面長) 장승환(張昇煥), 일본인 군서기 竹本 준공(竣功)"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창우 이장은 대심리 522번지에서 태어나 초등 2년때 서본리 76번지로 이사 후 지금까지 살고 있는 예천 토박이다. 19907월에 선거로 이장에 선출된 이후 성실한 자세로 각종 민원 및 불편사항 해결을 위해 발로 뛰며 적극적으로 봉사 하는 등 예천읍 29개리 이장 중 최장수, 최고령 이장이지만 초심을 잃지 않아 주민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투표 없이 지금까지 26년째 마을일을 보고 있다.

 

재임기간

성 명

~ 1980.1.31

안 홍 인

1980.2.1. ~ 1990.7.2

김복식(金福植)

1990.7.10.~현재까지

이창우(李昌雨)

[참고자료] 서본2리 역대 이장 연혁(沿革)

 

   

2002년 깨끗한 환경보전(군수), 2005년 농정발전유공(장관), 2007년 민방위대 창설 기념(군수) 표창을 여러 차례 수상한 이 이장은 사실 이장 일이 만만치 않아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년 정기총회시 사직서를 제출해도 주민들은 또다시 만장일치로 추대를 하고 있어 발목이 단단히 잡혔지만 어쩌면 행복한 고민인지도 모른다.

 

 

서본2(西本2)는 이 이장(영농회장 겸임), 새마을 지도자(김수진 62), 부녀회장(박미자 58), 서본2리 노인회장(장사윤 81, 회원 60), 한일주택 노인회장(조중래 77, 회원 25), 이원퍼스트 노인회장(박한수 79, 회원 18), 14개 반장 등 마을 운영위원들이 각종 행사시 서로 의논하고 협조하며 큰 불협화음 없이 마을의 모든 일들을 원만하게 잘 운영하고 있다.

 

 

마을 공사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서본2리 경로당 1979, 이원퍼스트 경로당 2005, 한일주택 경로당 2006년에 준공되었고 광역 상수도는 1970년대에 연결 됐다.

 

 

이 이장은 이장 재임 기간 중 서정자들 배수로 공사를 5여년간에 걸쳐서 완공해 몽리자들의 숙원을 해결했고, 고지대 지역인 상시당 마을의 진입로를 2차례에 걸쳐 확포장 완공해 차량 진출입 용이로 일상생활이 편리해진 것을 가장 큰 공적으로 꼽았다.

 

 

서본2리는 마을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매일 저녁 식사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있는데 마을의 벼재배 농가에서 쌀을 매년 기증하는 등 주민들간 서로 돕고 물건은 나누며 한가족처럼 화목하게 지내고 있기에 경로당내 다툼이 전혀 없다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서본2리는 예천의 다른 지역에 없는 성당과, 문화회관이 있다. 예천읍 서본리 74번지에 자리잡은 천주교 안동교구 북부지구 소속 예천성당은 대지 4,628(1400), 건평991(300)으로 19326월에 건축됐다. 관할지역은 19개면(용궁, 풍양제외)이며, 건물로 본당, 사제관(654-2042), 수녀원(프란치스코 전교봉사수녀회 654-3654), 성심어린이집(654-5750), 나눔의 집이 있다.

 

 

예천성당은 1780년 다산 정약용(세례자 요한)이 예천읍 반학정에서 생활하면서 약포사당(보문면)과 선몽대(호명면)를 방문하였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던 신유박해(1801) 때에 충청도에서 신앙생활을 지켜 나가던 신자들이 험난한 문경 새재를 넘어 예천으로 피난하여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어 거주하면서부터 예천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1932522일 이기순 도밍고 신부가 예천본당 초대주임으로 대구교구청의 발령(1932. 6. 51937. 5. 1)을 받아 부임하면서 예천본당을 창설했다. 현재 주임신부는 201396일에 부임하신 제20대 김기환(요셉) 신부이며 신자수는 1,759명이다.

 

 

예천성당 마당에 종각이 있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이종은 1932년 예천본당 설정 때 평양에서 구입한 것으로 1966년 박노제 신부가 프랑스에서 들여온 전자종을 설치하면서 사용치 않다가 1972년 봄 매기석 신부가 대죽공소에 주었다. 공소 신자들은 너무나 기뻐하며 손수레로 본당에서 공소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2015년 대림절(예수성탄전 4)에 다시 찾아와서 종각에 안치했다. 20151225

 

 

예천군문화회관은 서본리 240번지 예천성당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60억원의 예산으로 199565일 개관했다. 부지면적 21,313(6,447)에 건축면적 2,622(793)의 지하 1, 지상 3층의 건물에 공연장(711)과 전시실, 회의실로 구성되어 있고 예천 군민의 문화 공간 확보 및 집회, 복지 시설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이창우 이장의 하루 일상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골목 곳곳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민들 중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살피고 민원사항은 직접 접수 받아 읍사무소에 건의 드린다. 이장 본인의 나이가 많다 보니 자주 경로당을 찾아 불편사항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천읍 최장수, 최고령 이장으로서 이장직을 내려 놓는 그날까지 경로당 어르신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부진 일성에 서본2리는 도시속의 농촌처럼 이웃간의 벽이 없는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