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모래사장 푸르른 절벽…신선이 내려와 노닐만 하네
선몽대 전경 |
노송 속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꽂혀있고 松老高臺揷翠虛
흰모래 푸른 절벽 그려내기 어렵노라 白沙靑壁畵難如
내 지금 밤마다 선몽에 의지하여 구경하리니 吾今夜夜憑仙夢
지난번 진작 감상못한 소홀함 여한이 없노라 莫恨前時趁賞疎
- 퇴계 이황의 시 ‘선몽대에 지어보냄’ 寄題仙夢臺
내성천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선달산(1,236)에서 시작한 물길이 영주와 예천을 거쳐 문경시 영순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길이 110㎞ 규모의 하천이다. 한천과 남원천 단산천 낙화암천을 한줄기로 모아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아름다운 풍광과 절경을 쏟아낸다. 영주의 무섬마을과 예천의 회룡포마을을 낳았고 맑은 물에 긴 모래톱이 빼어나 모래강이라 불린다. 천의 끝에는 낙동강 줄기와 금곡천과 합류한 한천이 만나는 삼강이 있다.
예천의 내성천변에는 뛰어난 경관 덕에 정자가 줄줄이 들어서고 유서 깊은 문화유적도 많다. 보문면에 미산학사와 남하정이 있고 남서쪽으로 내려오면 강의 절벽 끝에 읍호정과 도정서원이 있다. 내성천이 끝나가는 지점인 지보면에는 신라시대 고찰인 장안사가 있다.
선몽대 옆에 조성된 숲 |
선몽대는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 강언덕에 평화롭게 자리잡은 정자다. 정자 앞에는 내성천이 낙동강 쪽으로 쉼없이 달리고 있고 정자 뒤에는 우암산이 정자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정자 서쪽에는 수백년된 노송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와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 노거수가 어울어진 아름다운 숲이다. 정자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자 제자인 우암(遇庵)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1563년에 세웠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하늘 에서 신선이 내려와 선몽대 자리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정자를 지었다. 지형이 기러기가 백사장에서 한가로이 쉬는 모습이다.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의 명당이다. 앞에는 강이요, 뒤에는 산이 둘러쳐진 배산임수형 명당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경관 덕에 명승 제19호, 예천 8경으로 선정됐다.
선몽대에서 본 내성천 |
선몽대가 들어선 마을은 백송리인데 흰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선몽대 뒤쪽을 백송터라고 부른다. 백송리의 진성이씨 입향조는 이열도의 아버지 이굉(李宏)이다. 이굉의 아버지 이하(李河)는 이황의 둘째 형이었는데 예천에 살던 박심의의 딸과 결혼하면서 예안에서 예천으로 들어왔고 이하의 둘째 아들인 굉은 백송마을을 개척해 진성이씨 입향조가 됐다.
이열도는 백송마을 진성이씨 집안의 스타였다. 어릴 때부터 학업에 뜻을 두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통달했으며 어려운 말과 글의 뜻을 잘 이해했다.1576년(선조 9) 병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로 벼슬을 시작해 사헌부감찰, 예조정랑을 거쳐 고령 현감으로 나아가 선정을 펼쳤으며 그 공을 인정 받아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선몽대 숲에 있는 우암 이열도 유적비 |
1587년(선조 20) 다시 내직인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어 금산군수, 강원도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상도 경산군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피폐해지자 고을을 다스릴 책임자로 이열도를 천거했다. 그는 경산에서 학업을 일으키고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민생의 근본을 세워 부임 1년여 만에 고을을 안정시켰다. 어느 날 도백에게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책의 표지 글씨를 써 달라는 것이었다.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열도가 크게 소리쳤다. “말할 것은 공사 뿐이거늘 붓을 놀리라고 모독을 하느냐” 그는 그 길로 탕건을 벗어던지고 선몽대에 들어와 다시는 벼슬길을 나아가지 않았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제자인 이열도가 지은 정자다. |
선몽대는 조선의 스타급 선비들의 문집 같다. 종조부이며 스승인 이황이 선몽대 편액글씨를 직접 써주고 시도 보내왔다. 이황이 편액글씨를 써준 덕에 이황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이 다녀가며 시를 남겼고 한음 이덕형과 청음 김상헌도 시를 남겼다. 1599년 가을에 참봉 조여익이 향시에 합격한 뒤 약포 정탁을 찾아왔다. 조여익은 이열도의 사위다.그는 선몽대를 이야기 하며 이황이 지은 칠언절구를 보여준다. 스승의 시를 마주한 정탁은 옷깃을 여미고 세 번 되풀이 해 읽은 뒤 절구를 차운해 시를 짓는다.
선몽대로 올라가는 암반 계단 |
서법은 지금도 응당 어제 쓴 것 같으니 書法至今應似昨
조밀한 글자에 성긴 행간 분명하구나 分明字密又行疎
주인께서 스스로 청허한 곳에 터를 잡으니 主人自能卜淸虛
낭원과 현도도 이곳보다 못하리 閬苑玄都此不如
꿈을 깬 후 몇 번이나 선몽대 위에 누워서 夢罷幾回臺上臥
하늘 가득 밝은 달빛에 성긴 별을 보았던가 滿天明月看星疎
바위 가의 높은 대가 온 허공을 끌어당기고 巖畔孤臺控八虛
적송은 구불구불 늙은 교룡 같구나 赤松蟠屈老虯如
새벽바람의 산시는 시끄럽다 조용해지고 曉風山市喧還靜
강가의 저녁 비 세차다가 다시 성글어지네 暮雨江郊密復疎
백년의 세월이 눈길 돌리듯 짧은데 百歲光陰轉眄虛
선몽대의 맑은 흥취, 끝없이 넓네 一臺淸興浩難如
늘그막에야 속세의 꿈이 헛됨을 깨달았으니 晩來始覺塵寰夢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 서툴지 않겠지 歸去田園計未疎
(하략)
- 정탁의 시 ‘퇴계 선생 ‘선몽대’ 시에 차운하여 조여익에게 보여주다’ 敬次仙夢臺退溪先生韻示曺汝益 五首
선몽대는 다산 정약용 집안과도 관계를 맺었다. 정약용의 7대조인 정호선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본 뒤 시를 남겼고 정약용 자신은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이곳을 다녀가면서 기문과 시를 남겼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선대 할아버지의 시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시를 읽는 장면이 감동적이다.
▲ 글 사진 / 김동완 여행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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