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변의 역사 2005.11.22.화
엄흥도와 영월엄씨
'위선피화 오소감심(爲善被禍 吾所甘心)-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수습하고 어디론가 사라져숩하고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귀가 바로 영월엄씨(寧越嚴氏) 가문의 가헌(家憲)이다.
어린 왕 단종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 앞에 서더라도 결코 두려워 않겠다던 엄가의 12세손 엄흥도(嚴興道)의 유훈이 그대로 문중의 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가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까마귀 밥이 되도록 “누구든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내려져 있었다.
충의공 엄흥도. 그는 영월 땅의 호장(향직의 우두머리)이었다. 서리발 같은 엄명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그는 거적에 싸인 구왕의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현재 단종의 묘가 있는 장릉)에 모셨다. 그리고 어린 핏줄 하나에 여생을 의지, 성을 갈고 영남지방 어디론가 훌훌 떠나버렸다.
현종에 이르러 단종의 무덤이 봉릉되고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단종의 주검을 수습했던 옛사람을 찾았으나 엄씨들은 무슨 재난이 닥칠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가문의 족적을 적어둔 문적까지 없애고 자꾸만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단종 묘에 선영이 있던 엄씨들은 묘가 능으로 추봉되면서 사방 5리 안에 있는 개인묘를 모두 옮기라는 어명에 따라 선영까지 포기하는 운명을 맞았다.
이 난리로 인해 오늘에 이르러서도 후손들은 10세조까지 묘를 모두 실전한 아픔을 겪는다.
엄흥도의 충절과 인륜의 도가 알려진 것은 영조 때이며 순조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란 호와 함께 사육신과 더불어 영월 창절사에 배향되었다.
고려조에서 수많은 명신현관을 배출한 엄씨는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11세손인 엄유온이 개국공신으로 가선대부 도총제부동지총제를 지내는 대대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에 이르러 엄씨가는 호된 시련을 겪는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죽음이 엄유온의 4대 손녀이자 성종궁의 귀인이었던 엄씨 등을 비롯하여 윤필상 등 12대신의 간계라는, 임사홍의 모함으로 이들 대신들과 함께 엄귀인의 아버지 사직공과 오빠 등 3부자가 참살을 당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으로 몰려 단죄를 받게 되는 이른바 갑자사화다. 이 일로 엄씨가는 한동안 빛을 잃는 듯 했다. 그러나 중종에 이르러 누명을 벗고 16세손 엄흔이 대제학으로 우뚝 솟아오르면서 선조들의 맥을 다시 이어 내려간다.
영월엄씨의 시조는 엄임의(嚴林義)다. 고려 때 호부원외랑을 지냈고 나성군에 봉해졌다. 엄임의는 본래 중국 한나라 엄자릉의 후손이다. 당의 현종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전파할 때 엄임의를 정사로, 영월신씨(寧越辛氏)의 시조인 신시랑을 부사로 파견, 우리나라에 왔다.
엄임의는 그 뒤 영월 땅 행정에 눌러 살게 됨으로써 영월엄씨의 시조가 되었다.
시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엄태인은 고려때 검교 군기감윤을 지내 군기감공파의 파조가 된다. 둘째 아들 엄덕인은 복야공파의 파조, 셋째 아들 엄처인은 문과에 올라 문과공파의 파조가 되어 세 갈래의 계통을 이룬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오대산에서 양 갈래로 떨어진 물길이 동강, 서강을 이루며 남으로 뻗다가 손을 맞잡고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점에 영월엄씨 가족들이 옹기종기 집성촌을 이루고 산다.
마을 안쪽 달무리처럼 집들로 둘러싸인 중앙광장에 노은행목이 수천 가지의 팔을 뻗쳐 하늘을 떠받들고 있다.
엄씨 시조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바로 그곳이다. 역사의 명암 속을 드나들며 대대를 이어 가히 1천여 년에 30세손에 이르고 있다. 한 마을에 25세손부터 30세손에 이르기까지 6대가 함께 산다.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행정(杏亭)이었다. 엄임의가 이곳에 정착 한 후 손수 은행나무를 심고 마을 이름을 행정이라고 지어 불렀다. 그러다 일제 때 행정구역 정리작업을 하면서 솔숲이 우거진 곳의 아랫마을이라고 해서 하송리라고 고쳤다. 지금 솔숲은 없어졌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는 엄씨가문의 상징이다. 수령 1천 년에 높이 36미터, 둘레 18미터로 천연기념물 76호로 지정돼 있다.
또 이 은행나무는 엄씨들 뿐만 아니라 영월사람들 모두 신수(神樹)라고 부른다. 경술국치였던 한일합방 때는 동편 큰 가지가 부러져 떨어졌다. 해방 바로 전에는 동쪽 가지가, 그리고 6.25 동란 때는 북쪽 가지가 부러져 나라가 재앙을 맞을 때마다 스스로 가지를 부러뜨려 이를 알려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 정복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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