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

엄현좌 할아버지

청솔댁 2010. 12. 23. 09:07

  예천의 자랑(2406) : 예천 출신 엄현좌 생원---

  엄현좌(嚴顯佐) : 1818(순조 18)-?, 본관은 영월, 충의공 흥도(興道)의 후손, 유학(幼學) 복범(復範)의 아들, 현부(顯孚)의 형이다. 조부모와 부모 슬하(重侍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846년(헌종 12) 식년 생원시에 3등 55위로 합격하였다.(司馬榜目, 醴泉郡邑誌 1895, 醴泉郡誌 1939)

  엄현좌(嚴顯佐) : 본관(本貫) 영월(寧越), 자(字) 양언(良彦), 호(號) 계은(溪隱)/ 이력(履歷)/ 엄현좌(嚴顯佐) 본(本) 영월(寧越) 자(字) 양언(良彦) 호(號) 계은(溪隱)/ 문경(聞慶) 금석문(金石文)/ 향토사료 제18집(2006년도 12월 발행. 문경문화원)/ 성균생원 엄현좌의 묘표(成均生員嚴顯佐의 墓表) : 산북면 내화리 산44/ 公의 諱는 顯佐요 子는 良彦이요 號는 溪隱이며 姓은 嚴이고 貫은 寧越이니 忠毅公諱興道의 十八世孫이요 仁祖丁丑亂때에 都監砲手로서 南漢山城에서 國王을 扈從하였고 瀋陽에서 十年間世子를 지켜온 通政大夫諱起生의 十一代孫이다. 高祖諱는 觀碩이니 通訓大夫司僕寺正의 贈職을 받았고 曾祖諱는 擎漢이니 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의 贈職을 받았고 祖諱는 重彬이니 嘉善大夫龍釀衛副護軍을 지냈고 考諱는 復範이요 枇는 月城李氏니 弼載따님이다. 公은 純祖戊寅十二月十五日이 고장에서 나시었으니 天姿英俊하였고 學問에 精通하시었다. 憲宗丙午에 進士에 오르시었으나 科擧의 뜻을 버리고 山林에 隱居하시어서 後學을 가르침을 畢生의 事業으로 하시었다. 家庭에서는 孝友를 다하였으며 鄕黨에서는 德望이 높았으며 忠毅公諡號를 물으는데는 膏心血誠을 다하여 千古持節을 세상에 빛나게 하였다. 高宗癸巳六月十一日考終하시니 享年이 七十六歲이었다. 居後山壬坐에서 安葬하였다. 配位는 延日鄭氏니 純祖癸酉四月二十日에 出生하시어서 高宗甲申八月初四日에 考終하시었으니 墓所는 論谷巳坐이다. 二男三女를 두시었으니 男은 夏敎, 正敎고 正敎는 叔父顯周에게 出系하였다. 女는 咸陽朴義澈에게, 宣城金輝文에게 醴泉權東周에게 各各出嫁하였다. 夏敎의 男은 鐘遠, 鍾洛, 金鶴이요, 女는 咸陽朴厚洙에게 出嫁하였다. 正敎의 男은 鍾善이다. 公이 下世하신지 於焉九十霜星이 지났으나 아직까지 墓儀를 갖추지 못하였더니 이해에 本孫으로서 溪隱精舍를 이룩하게 됨에 公에게 受業하던 門人들의 後系諸賢이 또한 정성을 모아서 이 墓碣을 세운 것이다. 이를 미루어 公의 陰德遺澤이 本孫과 門人에게 均一하게 미쳐온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어서 銘曰隱居行義는 君子의 자취었고 蓮榜揚名은 逸士의 빛이로다. 先徽를 闡揚하였으니 魯陵에도 구름이 걷히었고 後昆을 庇護하였으니 林壑에도 햇빛이 비치었다. 겸손으로 몸을 처하였으니 누가 敢히 猜忘하랴. 德으로 사람을 가르치셨으니 그 恩惠어찌 잊으리요, 한조각 돌을 세워 遺蹟을 기록하니 千秋百世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檀紀 四千三百十三年 庚申 八月 十五日/ 溪隱公 修員一同 謹竪/ 玄孫 相奎 謹書(daum 2010)

  엄현좌 : 石版本으로 간행된 溪隱亭實紀 2卷1冊(單)/ ◈ 溪隱亭實紀/ ◈ 저자사항 : 嚴顯佐 著/ ◈ 발행사항 : 미상./ ◈ 크기(가로*세로) : 19*28센티/ ◈ 상태 : 양호합니다./ http://kumyo.co.kr(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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