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기리는 청량정사에서 달마도 그리며 생활…나보다 자유로운 사람 있소?
이만훈 기자의 사람 속으로 - 청량산 ‘산꾼의 집’ 이대실
경북 봉화에 있는 도립공원 청량산은 이름난 명산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금탑봉을 가운데 두고 축융봉·경일봉·보살봉·장인봉 등이 에워싸 마치 낙동강변에 핀 한 송이 연꽃인 양 수려하기가 그만이다. 퇴적암으로 이뤄진 바위봉우리와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있는 나무와 숲 사이로 언뜻 낭떠러지를 이루는 기암절벽이 가히 장관이다.
헌데 청량산은 빼어난 경관만큼이나 기가 센 산이다. 그래서 기가 쇠진해진 이들이 단박에 기를 충전하는 데는 그만이지만, 그곳에서 줄창 살기는 어렵다. 드센 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립공원 입구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20여 분 오르다 보면 청량사(淸凉寺)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대실(64) 씨가 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청량산 산유(山遊)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 바로 옆에 ‘산꾼의 집’이라는 옥호로 벌써 18년째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눈빛 하며 걸지고도 우람한 목소리는 그가 이곳 청량산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평범한 사람이 기가 센 산에서 살지 못하듯, 기가 센 사람은 아랫동네에서 배기지 못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기를 무언가가 눌러주지 않으면 돌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씨와 청량산은 궁합이 맞는 셈이다. 속세에 있을 때 그의 명함은 다양했다. 영화배우·영화제작자·사진작가·사업가 등. 하지만 요즘 그는 자신을 ‘산허렁뱅이’라고 부른다.
산에서 헐렁헐렁 산다는 뜻이다. 한 시인이 그를 두고 “구름처럼 살며 바람처럼 떠도는/ 주인 같은 나그네 나그네 같은 주인”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세상은 나를 보고 웃지만, 나는 그런 세상을 보고 웃노라”며 큰소리친다. 자신이 정상(正常)이라는 외침이다.
하기야 그의 기질로 보아 ‘뜬 생활’을 하다 이곳에 와 정상을 되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꾼의 집’을 둘러보면 그의 생활과 철학이 한눈에 잡힌다. 현관문에 “오고 가고 아픈 다리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려”라고 써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를 무료로 대접한다.
당귀·산수유·진피·대추·박하·오가피·황기·계피·감초 등 아홉 가지 약재로 끓인 ‘구정차(九情茶)’다. 평일에는 하루 1000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2000~3000잔 소비되고 요즘 같은 단풍철에는 무려 하루 2만 잔 이상 필요해 아예 한 드럼씩 끓여댄다. 재료비만 줄잡아 연간 1000만원이나 들지만 개의치 않는다. 묘하게도 쓰는 만큼 채워지기 때문이다.
“산에 살지만 은둔한 것은 아니에요. 도자기도 굽고, 달마 그림도 그리고, 축제 행사에 불려가 소리하고 꽹과리도 칩니다. 이따금 강연도 하고요. 돈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지만 돈이 생겨요. 그걸 푸는 거죠.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예요.”
모든 것을 버리게 한 산, 모든 것을 갖게 한 산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생활은 빈한하다. 끼니도 된장국에 김치 한 조각이다. 하지만 그는 빈한함을 즐긴다. 그에게는 삼양라면에 달걀을 넣으면 ‘삼계탕’이 되고 멸치 몇 마리로 ‘굴비찌개’를 맛본다.
부엌에는 아예 도자기로 만든 굴비가 매달려 있다. 이 모든 여유와 지혜를 그는 산에서 배웠다. 그는 속세에 있을 때도 늘 산꾼이었다. 국내 웬만한 산은 몇 번씩 섭렵했고, 백두산은 여섯 번, 히말라야는 열 번, 일본의 북알프스와 남알프스, 말레이시아의 케나발루, 대만의 옥산 등을 다녀왔다.
지리산 종주는 스무 번이나 하고, 백두대간 종주도 했다. 지금도 암벽·빙벽 타기를 즐기고, 특히 지리산 사계는 놓치지 않는다. 대한산악연맹 대구경북연맹 간부(홍보이사)로 활동하고 경북북부지역 영양·안동·청송·봉화·영주산악연맹을 창설하기도 했다. 눈 내리는 날 청량산에서 논스톱으로 80m 점핑하는 거실 사진이 그의 실력을 가늠케 해준다.
이씨가 이곳에 들어온 이래 구조한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산에 관한 한 그는 프로다. 하지만 그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기술은 되는지 몰라도 정신은 모자라는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산은 절대겸손을 가르치는데 저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구석엔가 교만이 남아있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산의 도움을 받아 비우는 것을 배우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씨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운동이면 운동, 연기면 연기, 예술이면 예술-. 수준이야 차치하고 걸치지 않은 분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멀티플레이어다. 그래서일까? 그의 과거는 파란만장하다. 경북 봉화에서 유기 공장을 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보낸 이씨는 고향에서 초·중학교를 마친 뒤 대구로 유학하면서 방랑을 시작했다.
가업을 위해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구공고 기계과에 들어갔지만 입학하자마자 산에 미쳐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아 중퇴했다. 그에게 산은 어릴 적부터 각별한 존재였다. 검도의 달인(8단)이었던 아버지가 장남을 굳건히 키우려는 욕심에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시킨 뒤 검도를 가르쳤다.
하지만 어린 그에게는 지옥훈련이나 마찬가지여서 틈만 나면 마을 뒷산으로 도망쳤다. 마을에서 200m 남짓한 높이의 산이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거기에 가면 편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올랐다. 산은 그렇게 그의 유전자에 각인이 됐다.
사고 치고 끌려가 서둘러 올린 결혼식
그러던 그가 유학이랍시고 대구에서 외톨이 생활을 하게 되니 외로움을 탈 때마다 산을 그리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길거리에서 배낭을 멘 사람만 봐도 미칠 것만 같았다. 당시 대구에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이 H대 교수로 있으면서 대한산악연맹의 모체인 대구·경북산악연맹을 만들어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산악인들의 활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산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이씨는 마침내 배낭을 메고 가는 ‘형들(이효상 팀)’을 무작정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수업은 거의 제쳤다. 산악회를 따라다닌 지 1년쯤 되자 혼자 뛰기 시작했다. 형들한테 요령을 익힌 뒤여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정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였다.
떠나는 날은 있어도 돌아오는 날은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팔공산 등 대구 인근 산으로부터 시작해 점차 전국을 싸돌아 다녔다. 고교 3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바람에 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
“아버지께서도 제가 산에 미쳐 돌아다니는 것을 아셨지만 나무라지는 않으셨어요. 다만 ‘네가 가는 길이 맞다고 여기면 가라. 대신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물을 때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셨습니다. ‘혼구녕’ 대신 하신 그 말씀이 얼마나 준엄하게 들리던지…. 제가 지금껏 인생이라는 방랑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기둥을 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고교를 마친 그는 상경해 충무로2가에 있던 H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다. 타고난 역마살과 함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딴따라 끼’가 발현하는 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1년 동안 배우수업을 받은 뒤 이듬해인 1966년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튀는 데는 선수’인 그답게 4개월 만에 때려치웠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미 <상하이 박> <아편전쟁> <청춘교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등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본 데다 영화판 돌아가는 것을 안다는 생각에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 <비 나리는 오후 3시>를 만들었다.
자신이 감독도 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기꾼들의 꾐에 말려든 것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작품일 리 없었다. 필름을 들고 개봉관을 찾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는 형이 기도를 보고 있던 대구의 한 극장을 찾아갔다. 그곳은 ‘공장빼이극장’으로 통하던 하류 극장이었다.
우격다짐으로 걸었지만 사흘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학교도 때려치우고 당시 1억원쯤 하던 과수원만 날렸으니…. 하는 수 없이 다시 상경했다. 하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푼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청계천변에 있던 ‘날방’. 변소도, 부엌도 없는 날림인 데다 날마다 방값을 치러 이름붙은 극빈자들의 보금자리(?)였다.
일터는 새벽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밑에 서던 야채도매시장. 거기서 하루 밀 두 되를 받고 리어카를 끌었다. 방값으로 한 되를 쓰고 나머지 한 되로 입에 풀칠을 했다. 너무 힘들어 마약을 할까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직’에서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꾹 참았다.
“그렇게 석 달을 보내니 한계가 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있어봐야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죠. 마침 스님이 된 선배가 설악산에 있었어요. 그리로 갈 작정으로 기타 등 악기와 옷가지를 모두 후배에게 줘버렸습니다. 그런데 떠나기로 한 날 새벽에 사단이 생겼어요. 아버지께서 밤 열차로 올라오셔서 들이닥친 것입니다.”
빈털터리 몸으로 수십억 재산을 일구고
하지만 이번에는 운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지도 않았던 결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른들끼리 정해놓고 벌이는 게임이었지만 장남인데다 사고를 친 끝이어서 거역할 수 없었다.
색시를 보지도 못한 터여서 사진사인 것처럼 꾸며 처가로 찾아갔다. 처가는 안동 도산에서도 시오리나 더 들어가는 산골에 있었다. 가는 내내 속을 조렸다.
색시가 마음에 안 들면? 하지만 가족사진을 찍어주며 색시를 확인한 순간 안도할 수 있었다. 처가를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돼 결혼식을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스뎅그릇’ 바람에 유기 공장도 망해 집안이 어려워졌다.
이제는 튀려고 해도 튈 수가 없었다.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두고 입대해 월남에도 다녀왔다. “남들은 ‘빽’을 써서 안 가려는 월남을 저는 외려 담배를 두 상자나 사주고 지원했어요. 집안이 너무 어려워 전투수당이라도 벌고 혹여 총맞아 죽더라도 보상금으로 아버지가 재기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죠.”
하지만 막상 제대하고 나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고심 끝에 사진을 업으로 삼기로 했다. 사진 일은 아버지가 잘나가던 시절 카메라를 사줘 중학 시절부터 익혀온 분야. 하지만 직업으로 삼기에는 턱없는 실력이어서 대구로 가 1년 동안 사진학원을 다녀야 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2년이나 사진관 조수를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영양에 사진관을 차린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
하지만 처음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밑천이 달려 일제강점기 때 지은 목조건물 2층에 세를 얻어 차린 탓에 주고객 중 하나인 여학생들이 꺼리는 데다 세 곳이나 되는 기존 업소의 따돌림으로 하고많은 날 파리만 날렸다.
“6개월 만에 한 건 올린 것이 회갑사진 출장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돼지고기 한 근을 사 들고 집에 갔는데 그동안 주렸던 자식들이 허겁지겁 먹어대는 것을 보고는 목이 메어 구경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전략을 바꿨다. 마을마다 제일 끝자락에는 화전민 등 가난한 사람들이 살게 마련인데, 이들을 친구로 삼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터에 찾아주는 것만도 고마워 소주 한 병에도 그들은 감격해 했다. 시골의 특성상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그들도 마을의 대소사는 두루 꿰고 있어 결혼이며 회갑은 물론 돌잔치에 대한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다른 사진관에 비해 초짜였지만 미리 알고 집까지 찾아가 사정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다른 사진관과 특별한 사이가 아닌 이상 열이면 여덟, 아홉은 일을 맡깁디다.”
하루에도 몇 탕씩 뛰어다니느라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독하게 2년쯤 돌아치니 어느덧 영양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진관이 되어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따돌림하던 다른 사진관들이 “같이 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 바람에 그들이 독식하던 각급 학교의 앨범 일도 나눠 맡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의 기세였다.
하지만 사진 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2층짜리 건물로 옮겨 1층에는 사진관과 미장원을, 2층에는 예식장을 차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존의 예식장 두 곳에서 방해공작을 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비스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9인승 버스를 사 하객을 실어 날랐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 발상이었다. 더구나 교통이 불편한 시골에서는 그만큼 더 먹혔다. 1년쯤 지나 건물 뒤에 있던 창고를 개조해 식당까지 열었다. 결혼과 관련해 빼먹을 수 있는 것은 다 차린 셈이었다. 요즘 말로 토털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잘나가면 시샘이 따르는 법. 그렇게 한 10년 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건물 주인이 세를 2배로 올리는 것 아닌가? 당해본 사람만 안다는 세입자의 설움-. 그래서 직접 건물을 짓기로 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버스터미널 뒤에 있는 150평짜리 논을 사 3층 건물을 올렸다.
최신식 예식장과 식당·사진관·미용실을 두루 갖춘 영양 최초의 웨딩 전용 건물이었다. 시설로 치면 대처인 안동 예식장들도 울고 갈 정도였다. 여기에 예식비는 받지 않기로 하고 ‘무료예식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77년의 일이었다. “장삿속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주민들한테 신세진 것을 조금이나마 갚겠다는 생각에서 예식비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인데….”
대박이었다. 영양군 내 결혼식이란 결혼식은 다 쓸었다. 봉화 등 인근에서도 찾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면서 폼도 잡고 시골치고는 제법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지 못하는 그놈의 병이 다시 그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팔자에 든 역마살로 치면 사실 그동안 참고 살아온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산이 그리웠다. 사업을 하면서도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산을 찾기는 했지만 그것은 간식거리도 안 되었다.
산집생활 3년 만에 찾아온 극심한 외로움
“제가 저를 잘 알기에 결혼하면서 아내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족한테 주고픈 것의 60%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가족은 가장한테 받을 것 중 40%가 충족됐다고 판단할 때 산으로 가겠다고요. 아내가 ‘안 보내주면 어쩔 것이냐’고 해서 ‘그러면 결혼 못 한다’고 했더니 ‘가족을 위해 쎄가 빠지도록 벌어 놓으라’고 합디다. 그래서 죽자 사자 뛴 겁니다. 그래서 웬만큼 이뤄졌다 싶으니 그동안 가슴에 숨겨왔던 카드를 꺼낼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산에 다니며 몸에 밴 것이지만 일단 결정하면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그 아닌가? 즉시 배낭을 메고 청량산을 찾았다. 청량산은 그가 오래 전 점찍어둔 곳이었다. 중 2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읽고 원효대사를 흠모해 그의 족적을 찾아 다니던 중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가 원효에 의해 창건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여름방학의 끝무렵 청량사를 찾아 산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그는 “마치 금강산 사진첩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정작 목적지인 청량사는 거의 폐사(廢寺) 직전 상태로 늙은 비구니 한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워낙 주위 풍광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해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찾아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지냈다.
개학을 앞두고 비구니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면서 “중이 되겠다”고 했다가 “에라, 이 썩을 놈아. 세상에 내려가 잡일이나 하라”는 호통을 맞아야 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소년은 다짐을 했다.
“×발, 언젠가 내가 여기 와서 살지 않나 보자!”
그로부터 30년-. 소년은 어느새 불혹(不惑)을 훌쩍 넘겼건만 그날의 다짐을 잊지 않고 다시 청량산을 찾은 것이었다. 청량사 옆에는 청량정사가 있었다. 다 쓰러져가던 절은 말끔히 단장됐건만 정사는 폐가 직전 그대로였다. 정사에 달린 관리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청량산에서 살고자 하는 제게는 더 없는 명당이었습니다. 바로 뒤쪽에는 해동명필 김생이 글씨공부를 했다는 동굴이, 왼쪽 산중턱에는 최고운 관련 유적이 있는 자리이니까요. 그래서 퇴계 문중을 찾아가 관리사 건물에서 살겠다고 애원해 간신히 허락받았습니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틈틈이 찾아와 청소하고 손을 보았다. 쓰레기만 80㎏짜리 쌀 포대로 48포대를 치웠지만 힘든 줄 몰랐다. 1991년 한 해를 그렇게 보내자 그런대로 말끔해졌다. 하지만 가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아내조차 이듬해 봄 가출을 결행하기 며칠 전 현장을 찾아 도배를 거들어줄 때 처음 알았을 정도였다.
가장이 가출하는 것을 알면 집안이 흔들릴 것을 염려해 산행을 가장해 일체 숨긴 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아내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했다. 자식들한테는 도배를 마친 다음날 선언하듯 털어놨다. 큰아들한테는 예식장을, 작은아들한테는 사진관을, 며느리한테는 웨딩숍과 미장원, 막내딸에게는 어린이 놀이방을 각각 맡겼다.
아내에게는 뷔페 식당을 주었다. 당시 시세로 줄잡아 20억여 원어치 재산이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를 물려준 것이었다. 막 대학에 들어간 막내아들이 걸렸지만 큰아들이 보살피도록 당부 겸 다짐을 받았다. 가족들은 그가 사업을 하면서도 하도 산으로 나돈 데다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그다지 당황해 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다달이 돈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을 위해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길로 달랑 현금 2만5000원에 쌀 한 말, 된장 한 사발만 싸 들고 ‘청량산 집’에 살림을 차렸다. “제가 손재주가 좀 있어 그걸로 이 한 몸뚱어리 먹여 살릴 자신은 있었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호기롭게 산 살림을 차렸지만 막상 살려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기가 없어 절에서 초를 얻어다 불을 켜고 나무를 해다 밥을 지어 먹었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꿈꾸던 일이어서 불편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바람만 불어도 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구름이 떠가면 노래가 나왔다.
산을 쏘다니다, 아니면 오며 가며 들르는 등산객을 만나면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차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숱한 산행을 해본 그이기에 등산길에 마시는 한잔의 차가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처음에는 하루 10여 잔이면 되던 것이 금세 소문을 타 하루 100잔을 넘기더니 한 달쯤 지나서는 평균 하루 1000잔 정도로 늘어났다.
그렇게 들떠 그 해를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자신의 생활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3년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덮쳐 왔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만한 것이 술이었다. 매일 소주를 두 되씩 마셔댔다.
“물 한 잔에 맥주잔으로 한 잔씩 마셨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30~40분마다 한 잔씩 했어요. 곡기라고는 전혀 없이 그러다 보니 매일 술에 절어 지냈습니다. 자다가도 눈을 뜨면 담배보다 술에 손이 먼저 갔으니까요. 남들과 이야기하다가도 금세 술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더럽게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짓 하려고 산에 들어왔나? 이까짓 벽도 넘지 못하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이 개망나니야! 에잇, 술 뚝-. ‘술이 목구멍을 내려갈 때까지는 그리움이었다 가슴에 닿을 때는 눈물이었다.’ 일기에 적힌 대로 술을 끊던 날의 심정은 이렇듯 비장했다.
이씨는 그날 이후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심지어 막내딸이 시집갈 때 사돈이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온 100년 묵은 이탈리아산 와인조차 ‘쨍’만 했을 정도다. 술에서 헤어나니 산이 다시 보이고 흙 냄새가 새로웠다. 촉감도 예전과 사뭇 달랐다. 불현듯 흙과 더 친해지고 싶고 손맛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찾아낸 흙일이 바로 도예였다.
“이곳 저곳 알아보다 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하는 도예주부교실을 찾아간 것이 처음입니다. 저보다 열한 살 아래인 강석순 선생님이 가르치셨는데 대구 경북에서는 알아주는 분입니다. 수업이 매주 월·화 이틀씩이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번거로워 지하도에서 자고는 했습니다. 수강생이 전부 젊은 주부이고 남자라고는 저밖에 없었죠. 기초를 익히고 난 뒤 물레질은 경주 석천요의 심종승 선생한테 배웠습니다. 12월 중순부터 3월 말까지 내리 2년을 배웠습니다. 심 선생은 제 아들의 친구이자 까마득한 산 후배였지만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흙을 퍼 나르는 것은 기본이고 잘 보이려고 선생의 갓난애를 보행기에 태우고 다니기도 했죠. 1999년에는 현대도예를 공부하기 위해 1년 동안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한일도예대학에서 연수하고 귀국 후 다시 유럽으로 가 르네상스식 도예문화를 살펴봤습니다. 2001년 11월 명지대 대학원에서 한 달간 이론 공부도 했고요. 그래서 겨우 ‘기역’ ‘니은’을 터득해 지금껏 작업이랍시고 하고 있습니다.”
손맛이 아무리 좋아도 이씨는 전적으로 도자기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신명날 때 한 점씩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매년 100점 정도는 나온다. 그것을 모아 작품전을 열고는 한다. 그가 단주(斷酒)를 계기로 도예와 함께 정성을 다하는 것은 달마 그리기. 사실 달마도는 이씨가 어릴 적 원효대사에 심취했던 것이 달마대사로 이어져 30대 중반부터 독학으로 익혀온 장르다.
“저는 청년시절부터 달마대사를 엄청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이 늘 가슴 한 구석에 숨겨놓은 소망이었죠. 어렴풋이나마 저도 마음속에 있는 벽을 뛰어넘어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 분을 그리는 순간만이라도 그 분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달마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씨는 주로 인시(寅時)에 달마를 그린다. 밤에서 낮으로, 강(强)이 온(溫)으로 바뀌는 우주의 기를 담기 위해서다. 달마를 그릴 때면 그는 신이 들린 듯 모든 것을 쏟아낸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달마도는 인기가 있다. 국내는 물론 중국·미국·뉴질랜드·호주 등지에서도 초청전시회를 여러 번 열었다.
특히 전시회 때마다 달마 그리기 퍼포먼스를 펼쳐 그의 이름을 해외에 널리 각인시켜왔다는 평가다. 세상에서는 이씨를 두고 ‘자유인’이라고 한다. 명성도 높다. 그 바람에 가끔 인생 강의를 요청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15년 쉼표 찍고 다시 떠나는 발길
“나더러 그물에도 안 걸리는 바람 같이 사네, 향기 있게 사네 그러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술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오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냉각시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에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청산가리보다 더한 독주를 마셔가며 단련했기에 오늘의 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자유인이 아니라 ‘독한 놈’입니다.”
평소 그는 욕심을 비우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어 연말이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불도 없이 100일을 보내거나 만행을 다녀오고는 한다. 1년을 돌이켜 반성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것이다. 이씨는 조만간 ‘산꾼의 집’을 떠날 작정이다.
15년 전 도자기 가마에 첫 불을 지피면서 ‘또 가야 할 길이 있기에 동가숙 서가식 떠돌던 내 영혼 잠시 여기 쉼표를 찍는다’고 써놓은 대로다. 한 꺼풀을 벗으려면 변화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미 사람 타지 않을 만한 장소까지 물색해 두었다. 또 방랑벽이 도진 것일까?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완성을 위해 노력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방랑이 맞습니다. 마침표는 아니지만 더 늙기 전에 지금껏 해온 공부를 가다듬으며 내 자신과 놀 생각입니다.”
이씨는 벌써 죽음도 준비해뒀다. 자신이 어디서 죽든 화장해 청량산 자소봉 위에 흩날려주고 동시에 ‘야, 임마. 한판 잘 놀다 가네’라고 새긴 문패만 한 오석(烏石)을 박살내줄 것을 조건으로 4년 전 상조(喪助)를 들어 놨다. “깨버릴 것을 왜 비싸게 돈을 들여 만드느냐고요? 제 영혼이 그 글귀를 보고 껄껄대며 떠나갈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청량한 산바람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달마 동생인 척 폼을 잡더니 이번에는 아예 광풍(狂風)이다. 갈피가 잡히는 듯 마는 듯-. 과연 그의 정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