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등산(2009)

백두대간 속 백미구간

청솔댁 2009. 10. 8. 23:02
백두대간 속 백미 구간 ⑦ 소설가 김훈과 문경새재
자전거 놓고 걸어서 넘는 길, 햇살 한번 오지게 부시다
고조선의 백수광부는 물을 건너면 죽을 줄 알면서도 건넜다. 여기 삶이 싫었으니까. 고개를 넘는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앙일보]2009.10.08 00:03 입력 / 2009.10.08 00:23 수정
백두대간은 산 줄기다. 그 거침없는 산맥은 땅을 경계 짓고 왕래를 가로막았다. 백두대간으로 인하여 세상이 나뉘고 풍속이 갈리었다. 산 이쪽 사람은 산 저쪽을 동경했고, 산 저쪽 사람은 산 이쪽을 상상했다. 벽처럼 앞을 막고 있는 저 산만 넘으면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산 이쪽과 저쪽에서 사람은 꿈을 꾸었다. 그 꿈은 막연하고도 간절했다. 그래서 사람은 산에 길을 내기 시작했다. 가장 얕고 낮은 목을 노려 산을 넘었다. 고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백두대간은 수많은 고개를 대나무 마디 모양 등줄기에 업고 있다. 진부령ㆍ미시령ㆍ한계령ㆍ대관령ㆍ싸리재ㆍ죽령ㆍ하늘재ㆍ새재ㆍ추풍령ㆍ육십령 등 이름난 고개만 해도 헤아리기 어렵다. 그 고개는 전혀 다른 두 세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이자 분기점이었다. 고개로 인하여 호남과 영남이, 영남과 충청이, 영서와 영동이 구획되었고 또 연결되었다.

이번 달 week&이 오른 백두대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개 문경새재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한양과 동래를 잇는 가장 빠른 길 위에 있었다. 조선시대 행정과 교역의 대부분이 이 50리 고갯길을 넘나들며 이루어졌다. 하여 고갯길 굽이마다 숱한 사연이 쟁여져 있고 포개져 있다. 고개가 험할수록 쌓인 이야기는 눈물겹고 가슴 저민다.

그 고개를 소설가 김훈(61)과 함께 넘었다. 일찍이 자전거를 타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백발의 소설가는 볕 좋은 가을 날 두 발에 의지해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는 일은, 일종의 상징 의례다. 할 얘기가 많았다.

손민호 기자

소설가 김훈과 문경새재를 넘었다. 고개를 넘고서 소설가는 말했다. “고개를 넘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 단순한 이치를 왜 우리는 애써 모른 척하며 살고 있는지.
# 당면한 일을 당면하다

김훈은 막 원고를 탈고한 상태였다. ‘네이버’에 5개월 넘게 연재했던 장편소설 『공무도하』 집필을 마치고 겨우 한숨 돌린 참이었다. 안부 전화를 빙자한 섭외 전화는 그 틈을 노렸다.

-원고도 마감하셨으니 바람도 쐴 겸해서 산이나 함께 가시죠.

“신문에 나오는 일이냐?”

-네. 신문기자는 신문에 나오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럼 안 간다.”

-왜요?

“산에 놀러가는 일 따위로 어찌 신문에 나올 수 있겠느냐?”

-산에 놀러가는 일 따위를 기사로 만들어 쓰는 게 여행기자의 밥벌이입니다. 저는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입니다.

“그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나는 소설가다.”

-그럼, 산에서 소설 얘기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좋다. 소설 얘기만 하는 조건으로 가겠다. 그래,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어디를 가고 싶으십니까. 선배가 우리 산하를 낱낱이 알고 계신 까닭에 미리 네 가지 코스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남덕유ㆍ선자령ㆍ삼봉산ㆍ문경새재 중에서 어떤 걸 고르시겠습니까.

“새재가 좋겠구나. 새재에 가면 나눌 얘기가 많겠구나. 그건 그렇고, 너는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느냐?”

-선배도 20년 전엔 많은 사람을 괴롭히셨습니다. 저는 당면할 일을….

“됐다, 됐어. 간다고 했다.”

김훈은 신문기자 출신 작가다. 김훈을 “선배”라 부른 이유다. 김훈은 말을 할 때에도 제 문장처럼 말을 한다. 구어체를 구사하지 않는 현대인의 말투는, 낯설면서도 묘한 매력을 불러 일으킨다.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란 구절은 그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대사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이 빈궁과 대군을 받들어 강화로 가면서, 다시 말해 죽으러 길을 떠나면서 남긴 말이다. 역시 김훈의 상용어구다.

# 길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문경새재는 본격 산행이라기보다 트래킹에 가깝다. 계곡을 타거나 능선을 오르는 코스는 문경새재에 없다. 옛날처럼 굽이굽이 고갯길도 사라졌다. 관광객을 위한 신작로, 이게 문경새재의 오늘 모습이다. 김훈이 이날 산행을 “산보”라 명명한 까닭이다.

문경새재는 500년 이상 묵은 길이다. 조선 태종 때 처음 닦았다. 문경의 새재란 뜻으로, 새 조(鳥) 자를 써 ‘조령’으로도 불린다. 새재가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새도 날아서 넘지 못하는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개, 하늘재와 이유릿재(이화령) 사이에 있는 고개, 서울로 가는 샛길이 된 고개 등등 여러 주장이 난무한다.

여기서 하늘재는 새재 북쪽에 있는 고개다. 신라시대 때, 정확히 서기 156년에 뚫었다. 문헌에 기록된 한반도 최초의 도로이자 고개로, 새재가 개통하기 전 충청과 영남을 잇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하나 새재도 지금은 길로서의 수명을 다한 상태다. 일제 때 이화령에 터널이 뚫린 뒤 새재는 버림받았고, 이화령 역시 경부고속도로가 추풍령을 지나면서 한 세대 넘게 잊힌 길이 됐다. 길에도 흥망성쇠가 있는 것인지, 최근 개통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이화령을 통과하면서 이화령엔 다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새재는 박정희 정권 때 국토 순례 길이라 명명돼 보존되다가 최근 관광 명소로 거듭나면서 반듯하고 환하게 단장됐다.

김훈은 새재에 얽힌 사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50만 부 이상 팔린 여행 산문집 『자전거여행』에서도 김훈은 두 개 장을 헐어 새재와 하늘재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훤히 아는 길을 그는 왜 굳이 다시 걸으려 했을까. 문득 그의 소설 첫 머리가 떠오른다. 김훈은 4월 27일 『공무도하』 연재를 시작하며 아래와 같이 적었다.

“제목으로 정한 ‘공무도하’는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익사사건이다. 봉두난발의 백수광부는 걸어서 강을 건너려다 물에 빠져 죽었고 나루터 사공의 아내 여옥이 그 미치광이의 죽음을 울면서 노래했다. … 백수광부는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가려던 것이었을까. 백수광부의 시체는 하류로 떠내려갔고, 그의 혼백은 기어이 강을 건너갔을 테지만, 나의 글은 강의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강의 이쪽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훈에 따르면 백수광부는 넘지 못할 경계를 넘다 목숨을 잃었다. 강을 건너는 일과 고개를 넘는 일은,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다.

# 고개를 넘으며

문경새재 옛길에서 김훈.
트레킹은 충북 괴산의 조령산 휴양림에서 시작했다. 문경새재를 제3관문부터 거꾸로 내려오는 길을 택한 것이다. 까닭이 있었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 마패봉과 신선암 사이를 꿰뚫는 고개다. 하여 문경새재만 넘는다면 백두대간을 통과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제3관문에서 조령산 쪽으로 백두대간을 한 시간쯤 탄 다음 능선을 내려와 다시 고개를 넘어야 명색이 백두대간 산행이라 할 수 있었다. 산행을 안내한 승우여행사 이종승 대표는 “신선암부터 조령산까지 능선이야말로 백두대간의 백미”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바위 산을 오르는 일은 위험했고 또 너무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김훈은 문경새재를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트레킹은 이른 아침에 시작됐다. 아침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잎사귀엔 아직 푸른 기가 남아있지만 이 푸름도 이젠 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단풍이 오기 전의 푸른 색은 활력이 없다. 김훈이 앞장서 걸었다. 무척 잰 걸음이었다.

제3관문에 다다랐다. 백두대간이 이 관문을 지나간다. 이 능선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고구려는 거의 매일 전투를 벌였다. 고구려 장수 온달이 “하늘재와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며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전한다. 예서 몇십 리 안 되는 곳이다.

백두대간에 올라탔다. 오솔길은 아침 볕이 미치지 않아 서늘했고, 그늘진 산길엔 도토리가 수도 없이 떨어져 있었다. 전날 저녁에 먹은 도토리묵이 유난히 고소했던 증거가 이 길 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투두툭, 무언가 땅에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가 연방 들려왔다. 가을 초엽의 산은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로 즐겁고 발랄했다. 도토리를 움켜쥔 다람쥐가 걸음을 재촉하며 일행을 앞질렀다. 40년을 넘게 산을 오른 이종승 대표가 “발밑을 조심하라”고 이른다. 가을 산 낙상 사고의 대부분이 도토리를 밟았다 미끄러져서 생긴단다.

백두대간 능선을 한 시간쯤 탄 뒤 제3관문으로 돌아왔다. 관문 아래로 큰 길이 시원하게 뻗어있고 그 오른쪽 수풀 사이로 옛길이 나 있었다. 옛길로 접어드니 ‘장원급제의 길’과 ‘금의환향의 길’이라는 푯말이 잇달아 나온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고개를 넘었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새재를 고집한 이유가 우스개처럼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고갯길은 크게 세 개가 있었다. 추풍령과 죽령, 그리고 새재.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고 해서 유독 이 고개를 넘었다. 하나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 김훈 특유의 독설이 이어진다.

“패가망신의 길이었지. 과거에 급제한 영남 선비가 몇이나 됐을까. 과거에 붙은들 벼슬을 받아야 출세를 하지. 진사나 생원 정도 얻었다고 팔자가 피는 건 아니었지.”

김훈의 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옛길을 따라 옛 선비가 새재를 넘으며 남긴 시가가 목판에 걸려 있었는데, 금의환향의 환호작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오랜 낙방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가난한 선비의 회한이 훨씬 많았다. 이를 테면 아래와 같은 시가다.

‘옛 가죽옷 떨어진 지 몇 해나 되었던가/천 리 길 풍상에 귀 밑머리 희었구려/높은 봉우린 눈에 덮혀 봄 늦게 오고/돌다리엔 얼음 얼어 말 걸음 더디네’ - 전익상(1634∼1697)

# 고개는 사람이 만들었다

장원급제의 길인지, 아니면 김훈의 말마따나 패가망신의 길인지를 마치고 큰 길로 접어들자 문경새재 아리랑을 새겨놓은 커다란 노래비석이 나타났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홍두깨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질에 놀아난다/문경새재 넘어갈 때 굽이야 굽이야 눈물이 난다’.

김훈이 큰 소리로 읽더니 이내 잘라 말했다. “음담패설이네.” 새재를 넘는 일이 노동에 버금갈 만큼 혹독한 일이었다면, 지친 발걸음에 흥을 불어넣기 위한 자잘한 재미 정도는 필요했을 터이다. 실제로 새재 50리 길은 예부터 박달나무가 우거졌다 하고, 고갯길이란 으레 발품보다 입심으로 넘게 마련이란 옛말도 있다. 그러고 보니 문경새재엔 유난히 귀신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온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김훈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그거 아나? 진도아리랑에도 문경새재 얘기가 나오는 거?”

김훈의 기억은 정확했다. 진도아리랑 첫 머리는 ‘문경새재는 몇 구비냐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로구나’로 시작한다. 한양에서 진도를 오갈 때 새재는 길목에 없다. 그런데도 진도의 섬 사람은 문경새재를 넘을 때의 눈물을 노래한다. 남도 끝자락의 섬 사람 중에서 그 옛날 몇이나 문경 땅까지 올라와 이 험한 고개를 넘었을까. 섬 사람은 새재를 넘지 않고도 알았던 게다. 문경새재를 넘는 일은, 이 땅의 모든 고개를 넘는 행위를 상징한다. 즉 새재는 이 땅의 모든 고개를 넌지시 가리킨다.

제2관문을 지척에 둔 지점, ‘이진터’라 적힌 작은 나무판이 보였다. 거기에 깨알같이 적힌 글은 임진왜란 때의 비극을 전하고 있었다. 부산에 왜군이 상륙하자 신립은 군사 8000명을 이끌고 새재에 진을 친다. 제2진의 본부를 바로 이 길목에 설치했다 하여 ‘이진터’다. 하나 신립은 이 천혜의 복병 장소에 병사를 배치하고 않는다. 대신 조령산 능선에 조선군으로 위장한 허수아비를 세운 뒤 충주 탄금대로 물러가 배수진을 친다. 왜군은 여기에 필시 조선군이 매복해 있으리라 판단하고 세 번이나 초병을 보내 조령산을 정탐한다. 왜군 초병은 조선군 허수아비의 머리에 새가 앉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군이 철수했음을 알아차린다. 왜군은 춤을 추며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그 뒤는 역사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다. 신립의 부대는 탄금대에서 전멸한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은, 이 어처구니없는 역사를 낱낱이 알고 있었다. 김훈의 평가는 가차없었다. “이 한 번의 전술 착오로 전쟁은 일찍이 결정나 버렸다.”

김훈은, 엄격한 의미로 현대인이 못 된다. 그는 아직도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 모르며, 컴퓨터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런 그가 인터넷에 소설을 연재했다.

“단 한 번도 내 소설이 연재되는 현장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다만 연재라는 형식을 통해 내 나태한 글쓰기를 강제하려고 했을 뿐이다.”

김훈은 여전히 원고지에 연필로 원고를 썼고, 그 원고를 출판사 직원이 받아쳐서 인터넷에 올렸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김훈에게 바뀐 건 없었다. 김훈은 여전히 맨 앞에서 걸었다. 걸음은 좀처럼 늦춰지지 않았다.

# 길은 주인이 없다

마침내 제1관문에 도착했다. 네 시간 가까이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김훈이 비로소 널찍한 바위 위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이내 신발을 벗더니 양말까지 벗어 젖힌다. 발가락 사이를 매만지는 모양에서 무좀을 알아차린다.

-무좀이 있으시군요.

“좀 싸돌아 다녔어야지.”

-이번 소설에서 무좀에 관한 묘사가 유난히 생생하다 싶었습니다. 제 몸이 근질거리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무좀 얘기 잘 썼지? 그게 다 경륜이다.”
소설엔 사회부 기자 문정수가 등장한다. 당대에 발생한 여러 사건을 그가 취재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이 민완기자에게도 무좀이 있다.

-옛날 취재수첩을 여태 갖고 계세요?

“다 갖다 버렸다.”

-소설이 마치 옛 취재수첩을 꺼낸 것처럼 사건 묘사가 치밀한데요.

“나는 당대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에서 하고 있을 뿐이다. 신문기자가 등장하는 건 소설적 장치에 불과하다.”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 발길은 옛길박물관을 향하고 있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자 정면 벽에 도산자 김정호가 썼다는 큰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천하의 형태는 산천에서 볼 수 있다. 산은 본디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온 것이다.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김훈이 소리내 읽더니 해설을 달았다. “이 문장은 본래 신경준의 것이다. 백두대간의 흐름을 처음 세운 성리학자다. 그는 자연을 알 수 없는 선비였으나 그는 자연을 철학적 사고로 이해한 문장가였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고 맨 먼저 쓴 이도 신경준이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다, 이 문장은 김훈도 쓴 적이 있다. 하늘재를 낸 지 2년 뒤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는 죽령을 개통한다. 산 너머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도로였다.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를 쳤던 것처럼 고구려 군대도 죽령을 따라 신라로 쳐들어왔다. 그때 김훈은 이 문장을 구사했다.

-왜 소설 제목이 ‘공무도하’입니까.

“물을 건너면 죽을 줄 알면서도 백수광부는 물을 건넜네. 여기 삶이 싫었으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물을 건너려 한 게지. 물 건너로만 가면 뭔가 나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게지. 그러나 그 물은 건널 수 없는 것이었네. 물을 건너는 건 결국 죽는 일이란 거지.”

-그러니까 물을 건너라는 겁니까, 건너지 말라는 겁니까.

“좋든 싫든, 결국 여기서 이 땅에서 발 딛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지. 아니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

갈 수 없는 길을 가려고 바둥댈 때 우리의 걸음은 처진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랄 때 우리의 삶은 비참하다. 길에 주인이 없다는 말은, 길을 아무나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도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고개를 넘었다. 충북 괴산을 떠난 걸음은 네 시간의 전진 끝에 경북 문경에 다다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식당 간판이다. 달라진 건 없었다. 김훈은 새재를 넘은 뒤 미루어 놓았던 작가의 말을 출판사에 보냈다. 몇 문장 안 되는 짧은 글이었다. 거기서 김훈은 다음과 같이 썼다.

쓰기를 마치고 뒤돌아보니, 처음의 그 자리다. 남은 시간들 흩어지는데, 나여 또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산행정보=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연풍 IC에서 빠져 3번 국도를 타고 조령산 휴양림으로 가면 제3관문 입구가 나타난다. 제1관문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려면 문경 IC에서 거슬러 오르면 된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거리는 7㎞가 채 안 되지만, 제3관문에서 백두대간 마루를 올라탔다 내려온 거리와 제3관문까지 올라간 거리, 제1관문 아래 주차장까지 이어진 거리를 합치면 10㎞는 족히 걸었다.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10, 11, 18, 25일 당일 여정으로 문경새재 트레킹을 떠난다. week&이 밟은 코스와 대체로 유사하다. 백두대간 능선은 타지 않고 제3관문에서부터 제1관문까지 내려온다. 3만9000원. 02-720-8311. 고개를 넘기 전 조령산휴양림 식당(043-833-5689)에서 한방백숙(4인분 4만 원)을 먹었고, 고개를 넘어 새재할매집(054-571-5600)에서 양념돼지구이(1인분 1만1000원)을 먹었다.

◇이달의 산행 팁=대표적인 사계절 착용 아이템을 소개한다. 우선 선글라스. 대표적인 사계절 아이템이다. 자외선 차단 기능 말고도 눈 타박상이나, 눈 주위의 점이나 기미를 예방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는 특히 렌즈의 명도와 상관없이 시력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다. 다음으로 장갑. 코스에 따라 나무를 사용하거나 바닥을 짚을 수 있어 장갑은 끼는 게 좋다. 봄ㆍ가을엔 플리스 소재의 얇은 장갑을 착용해 적당한 보온성을 유지할 수 있다. 바람막이 재킷도 중요한 사계절 아이템이다. 산 위의 기후가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도 바람막이 재킷은 반드시 입거나 배낭에 넣고 다녀야 한다. 우의 대용으로도 유용하다. 자료=라푸마

'등산 > 등산(200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량산 이대실씨 이야기  (0) 2009.10.28
090913구례 오산(사성암)(흑응271회)  (0) 2009.09.13
090908쪼록바위봉(매화55회)  (0) 2009.09.08
090906장안산(운용)  (0) 2009.09.07
090901구룡산 (매화54회)  (0) 2009.09.02